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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몰래 넣었다”…15년 만에 누명 벗나

입력
2017.01.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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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사기도박단 신고하려다

마약 범죄자 몰린 50대 사업자

“명동 사채왕 최씨가 기획한 일”

공범 여성의 진술로 재심 확정

사기도박단의 조작으로 마약 범죄자로 몰려 옥살이까지 한 50대 사업가가 사건 발생 15년여 만에 억울함을 풀 길이 열렸다. 그를 옭아맨 도박단 여성이 다른 형사사건에서 자백한 게 결정적이었다. 진술만으로 재심 사유가 인정된 건 이례적이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강성훈 판사는 마약 소지죄(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3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고 2002년 6월 벌금형을 선고 받은 사업가 신모(58)씨가 낸 재심 청구를 지난 2일 받아들였다.

신씨가 마약 덫에 걸린 전모는 이랬다. 그는 2001년 12월 서울 방배동 한 다방을 찾았다. 그가 사기도박에 속은 걸 알고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도박단은 신씨가 날린 7억원 중 일부를 돌려주겠다며 불러낸 게 함정이었다. 도박단 일원인 장모씨가 컵을 깨뜨리며 시비를 걸어 신씨와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틈에 다방에 있던 여성 정모(67)씨가 필로폰이 든 비닐봉투를 몰래 신씨 주머니에 넣었고 때마침 경찰이 들이닥쳤다. 112신고가 되면 통상 파출소 직원들이 현장에 와 경찰서에 넘기는 게 일반적인데, 그날은 강력반 형사가 출동한 것이다. 신씨는 꼼짝 없이 마약사범으로 찍혔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법원에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 받았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건 7년 뒤다. 정씨가 검찰에서 신씨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도박단이 ‘명동 사채왕’ 최진호(63)씨에게 1억원을 줘 의뢰한 범죄였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최씨와 정씨간 돈 문제 등의 앙금으로 인한 정씨의 폭로였다. 당시 다방에는 최씨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 후 신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자초지종을 듣고 누명을 벗으리라 기대했지만 최씨는 마약사건으로 구속되지도, 유죄를 받지도 않고 2010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최씨가 1심 첫 공판 전 정씨에게 10억원을 주며 진술 번복을 회유한 사실을 2심 재판부도 알았고, 정씨가 처벌을 감수하며 “신씨 주머니에 내가 마약을 넣었다”고 거듭 자백했지만 법원은 확신에 찰 정도의 증거가 없단 이유로 죄를 묻지 않았다.

최씨는 돈으로 증인은 물론, 현직 판사의 양심까지 사서 위기를 모면했다. 최씨는 당시 신임법관 연수를 받던 최민호 전 판사에게 금품을 주며 수사 진행상황 등을 전달받는 도움을 받았고, 마약 사건 당일 함께 있던 J씨에게도 경제적 이익을 약속하며 위증하게 했다. 신씨는 수사ㆍ재판에서 그의 힘을 실감해서 항소도 포기했다.

하지만 최씨가 2012년, 최 전 판사가 2015년 각각 구속되면서 신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정씨와 최씨 내연녀 한씨의 구체적 증언으로 마약사건이 최씨의 기획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강성훈 판사는 “정씨 진술은 당시 마약사건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될 수 없었고, 신씨는 그때 정씨가 다방에 있었는지 알지 못해 해당 진술을 제출 못한 데 과실이 없다”며 재심의 새로운 증거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정씨 등의 진술은 마약사건 당시 사실인정의 기초로 삼은 증거와 모순된다”며 “당시 판결을 그대로 둘 수 없을 정도로 증거의 명백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신씨는 이날 “사법기관에 대한 잃어버린 신뢰가 쉽게 회복되진 못할 듯하다”고 말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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