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황현산의 따뜻한 독설 받은 사람

입력
2016.08.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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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황은후, 창작 가무극 ‘왕과 나’ 캐스팅

“가장 낡은 연극, 가장 실험적인 연극”

“2~3달 근미래(近未來)만 생각하면 연극배우도 살만한 것 같아요.” 딸 황은후씨의 말투는 발랄한 구어체이지만 아버지 황현산씨의 단어가 인터뷰 중간에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애들 글이 내 문체와 닮았다”는 아버지 황씨의 호언이 빈 말은 아닌 듯 싶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3달 근미래(近未來)만 생각하면 연극배우도 살만한 것 같아요.” 딸 황은후씨의 말투는 발랄한 구어체이지만 아버지 황현산씨의 단어가 인터뷰 중간에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애들 글이 내 문체와 닮았다”는 아버지 황씨의 호언이 빈 말은 아닌 듯 싶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배우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요.”

31일까지 서울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에서 공연하는 창작 가무극 ‘왕과 나’는 조선시대 장희빈(장옥정)과 숙종의 잘 알려진 ‘상열지사’를 참신하고 전복적인 관점으로 비튼다. 15명의 배우들이 기타ㆍ북ㆍ아코디언ㆍ하모니카 등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고, 때로 해설자로 등장해 함축적인 대사도 주고받는다. 1인 다역을 기본으로 하는데, 한 배역을 여러 배우가 나눠 맡기도 한다. 장옥정을 연기하는 배우만 3명. 숙종을 처음 만난 장옥정을 연기하는 배우를 대신해 갑자기 다른 배역을 하던 여배우가 장옥정 행세를 하고, 의아해하는 관객들에게 장옥정이 무심히 저 대사를 내뱉는다.

한데 이 세 명의 장옥정 중 ‘주요 옥정’으로 출연하는 여배우 얼굴이 누군가와 꼭 닮았다. 배우 정새별과 이 역에 더블캐스팅 된 황은후(33)씨는 문학계의 아이콘, 황현산 평론가(71ㆍ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의 딸. 재작년 극단 떼아뜨르봄날에 입단해 ‘그리스의 연인들’(2015), 이 작품 등에서 주역을 맡았고 최근 국립극단의 ‘갈매기’에서 마샤 역으로 일반에 이름을 알렸다. 말하자면 부녀가 이 최첨단 시대에 아날로그 예술 장르의 대표격인 셈이다.

“글 쓰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은 자기 글이 세상에서 제일 못 쓴 것 같아. 말 안 돼도 밀고 간 논리비약, 콤플렉스 이런 게 다 들어있는 게 보이거든요. 가족이 나오는 연극도 비슷해요. 온갖 종류의 티가 보이죠.”

연극 '왕과나'에서 장옥정으로 출연한 황은후(오른쪽)씨. 딸이 맞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아버지 황현산씨는 키스신에서는 "그냥 연기구나 한다"고 말했다. K아트플래닛 제공
연극 '왕과나'에서 장옥정으로 출연한 황은후(오른쪽)씨. 딸이 맞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아버지 황현산씨는 키스신에서는 "그냥 연기구나 한다"고 말했다. K아트플래닛 제공

12일 극장 맞은 편 한 카페에서 만난 황현산 평론가는 딸의 연기에 이렇게 직격타를 날렸다. “작년 수술 받으며 놓친 한두 개를 빼곤 딸이 나온 연극은 거의 다 봤다”는 그는 “연기할 때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하는 태도가 나오더라”고도 덧붙였다. “딸이 연습 들어가면 집안 분위기가 달라져요. 어딜 가나 대본 연습한다고 중얼거리니까 집에 귀신 하나 있는 거 같아(웃음). 이번 작품은 그런 게 없었는데, 공연 보니까 대사가 별로 없데!”

함께 만난 은후씨도 “아버지 글은 칼럼 발표 때마다 챙겨 읽는데, 꼭 저에 대해 쓸 때는 못 되고 독한 딸로 쓰시더라”고 맞받는다. 너무 유명한 아버지를 둔 탓에 “불문학은 전공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대학에서 중국문화를 전공했고, 전공보다 연극동아리(서강연극회)에서 살다시피하며 연극에 빠졌다. “고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녔는데 그때 본 첫 연극이 너무 강렬했어요. 일상보다 꽉 찬, 밀도 짙은 세계가 코앞에 펼쳐지는 일종의 증강현실이었죠.”

연기로만 풀어지지 않는 갈증은 절친인 배우 김정과 만든 2인 프로젝트 그룹 ‘삼악별의 오로라’에서 극작, 연출을 하며 푼다. 지금껏 만든 작품은 김애란의 단편소설 ‘큐티클’을 극화한 연극이 전부지만 딸이 쓴 희곡을 읽은 아버지 황씨의 평가는 “내 문체하고 비슷하다”는 것. 작품 해설을 받는 데만 족히 1년은 걸리는, ‘매의 눈’ 비평은 딸의 작품 앞에서 칭찬으로 점철된 논리 비약으로 치닫는다. “아 잘 썼더라니깐!”

여기서 고백까지 한 자락. “나도 대학 때는 연극 보러 많이 다녔어. 특히 실험극장 연극을 자주 봤고 희곡도 두어 편 써놨지. 대학원 가면서 전부 그만뒀는데 공부 안했으면 소설가나 시인이나 극작가가 됐을 거예요.”

문학평론가 황현산(왼쪽), 연극 '왕과 나'에 출연한 딸 황은후씨.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okilbo.com
문학평론가 황현산(왼쪽), 연극 '왕과 나'에 출연한 딸 황은후씨.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okilbo.com

아버지 황씨의 고백에 딸 황씨도 슬쩍 고백을 꺼내놓는다. “(아버지 작업에)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돼요. 일단 어릴 때부터 거실이 서재 겸 아버지 작업실이라 책이 항상 주변에 있었거든요. 마샤 역 맡았을 땐 최승자 시집을 읽고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고, 정 캐릭터가 안 잡힐 때는 아버지께 여쭤보기도 하죠. 주변에 특이한 문인 많이 아시니까요.”

신작 ‘왕과 나’에서는 이런 캐릭터 만들기가 따로 필요 없었단다. “뜬금없이 춤추고 노래하고 동서양 혼재된 대사가 쏟아지는, 한판 놀고 끝을 향해 나아가는 ‘연극적인 연극’이라 작품 자체가 무대 열리고 닫히는 것과 닮아 있거든요. 장옥정 캐릭터는 그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설정했죠.”

“한편으로 비평가라 객관적인 시선도 있다”는 아버지 장담은 딸의 작품을 평해달라는 청에 단박에 깨진다. “문학은 예술이 해온 온갖 종류의 실험을 다 해왔다고 내 비평에 썼어요. 콜라주니 몽타주니 혼종이니 하는. 이번 연극보고 글쓰기로 안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데요. 연극이 제일 낡은 장르인데 어떻게 보면 가장 실험적인 장르구나, 싶은 작품이에요.”주례사 비평의 정점을 찍은 후 멋쩍은 듯 덧붙인다. “한데 난 딸이 연극을 하기 때문에 연극 비평 못할 거 같아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연극 '왕과 나'에서 장옥정 역을 맡은 황은후(가운데)씨. K아트플래닛 제공
연극 '왕과 나'에서 장옥정 역을 맡은 황은후(가운데)씨. K아트플래닛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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