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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의 어느 ‘평범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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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월 11일
1916년 2월 11일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이 미국 여성들에게 피임법을 공개 강연한 뒤 체포됐다. ‘콤스톡 법(Comstock law)’으로 불린 연방음란규제법을 위반한 혐의였다. 1873년 제정된 콤스톡 법에 따르면 ‘피임’도 반 풍속 행위였고, 법원은 그에게 벌금 100달러를 판결했다. 하지만 열혈 아나키스트인 골드만이 그 판결에 순응할 리 없었다. 그는 2주일의 징역을 살았다.
골드만은 러시아령 리투아니아에서 1869년 태어나 16살이던 85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19세기 말 미국은 자본주의의 형성기이자 노동 운동의 성장기였다. 그는 봉제공장 노동자가 됐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주급 2달러 20센트. 하지만 당시 미국 노동 시장은 계급 문제뿐 아니라 인종ㆍ민족 문제와 성차별이 중층적으로 쌓인 아수라장이었다. 유대인 여성 이민자출신 노동자인 그는 저 모든 구조의 ‘을’이었다.
이듬해 5월 ‘메이데이’의 유래가 된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이 터졌다.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자 총파업 시위 현장에서 폭탄이 터져 경찰과 노동자 등 7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시위 주동자로 체포된 7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2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됐지만 1명은 자살했고 4명은 공개 처형됐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달리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통 좌파 세력이 약했고, 초창기 노동운동을 주도한 이들도 대부분 아나키스트였다. 골드만은 저 사건 직후 아나키스트가 됐다.
그는 독서광이었고, 감옥은 그의 학습장이었다. 알렉산더 버크만(1870~1936) 등과 함께 활동하며 1893년 소요 선동죄로 1년형, 1917년 반전ㆍ징병반대 운동으로 2년형. 그는 빼어난 연설가였고, 거리는 강연장이자 이념 투쟁의 무대였다. 19년 러시아로 강제 추방된 뒤 볼세비키의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 유혈진압(21년) 실상을 보게 된다. 그는 볼세비키에 맞서다 프랑스로 망명, 유럽 각지를 떠돌며 강연했고 36년 스페인 반프랑코 운동에도 가담했다.
진정한 좌파는 언제나 소수라는 말이 있지만, 아나키스트야 말로 소수의 숙명을 내장한 존재들이다. 모든 형태의 권력을 부정하며, 어떠한 권력과도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 골드만의 삶이 그러했다. 반전 평화, 노동운동, 언론자유, 성 평등…. 피임과 산아제한의 대모 마거릿 생어(Margret Sanger, 1879~1966)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로서 그는 자유 연애를 신봉했고, 또 웅변했다.
1940년 만년의 거처였던 캐나다에서 숨진 그는 사상의 고향이던 시카고 헤이마켓 아나키스트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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