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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반(反)지성주의 퇴치법

입력
2015.10.14 10:37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야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자와 교사, 대학생, 학부모들도 도저히 이건 아니라며 거리로 나올 태세이다. 하지만 이런 반대 목소리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최근 일본의 안보법제 반대 운동처럼 들불처럼 타올랐다가 지레 지쳐 사그라지지는 않을까. 아베 신조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 정권 또한 이런 반대 주장들을 원천적으로 무시하고 매도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옳고, 다른 목소리는 아예 들을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두 정권은 닮은꼴이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난 이런 괴이한 일은 ‘이념대결’로 포장되기 일쑤이지만 사실과 논리에 근거한 논쟁을 결여한데다, 무엇보다 권력을 추종하는 인사들이 ‘지성인’을 자처하며 다른 지성인들을 공격하는 돌격대로 나섰다는 특징이 있다. 힘으로 민주국가의 상식을 파괴하고 국격을 망가뜨리면서도 적반하장 격으로 다른 주장을 ‘비지성적’이라고 윽박지른다. 때문에 이는 일종의 반(反)지성주의적 폭거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지도부가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역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는 동안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 저지선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명대에 다가와 고함을 치며 책상을 두드리는 등 소란을 피워 경찰이 출동해 저지했다. /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지도부가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역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는 동안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 저지선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명대에 다가와 고함을 치며 책상을 두드리는 등 소란을 피워 경찰이 출동해 저지했다. /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50여 년 전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을 쓴 리처드 호프스타터는 반지성주의를 “지적인 삶과 지성인에 대한 분노”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이런 반지성주의가 매우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지적 능력이 다소 모자라는 비(非)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지성 그 자체에 대해 매우 모멸적이고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증성, 객관성을 무시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지성적인 것을 뿌리째 부정하려는 증상이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학력 수준과도 무관하다. 유명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잘못된 근현대사를 바로 잡겠다”면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언제냐고 묻자 “불필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며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70년대 국정화 당시 집필진이 현재 집필진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가 있다”는 등 자기만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면서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그 어떤 지적인 토론도 불허하겠다는 것이다. 지성주의 자체를 혐오하거나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의 발현으로밖에 볼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도 없고, 오로지 권력자가 정한 답안을 되풀이할 뿐이다.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저변을 장식하는 몰염치와 탐욕만이 넘실거린다.

일본에서는 집단적 자위권 관련 법제를 관철하기 위한 돌격대 역할을 맡았던 이소자키 요스케 총리보좌관이 “때때로 ‘입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는다”고 고백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도쿄대 법학부를 나온 데다, 헌법 재해석을 통해 일본의 안보 체제를 통째로 갈아엎겠다고 나선 인사가 입헌주의가 뭔지도 몰랐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관심 없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알 필요가 없다고 믿고 이를 실천하는 반지성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이런 반지성주의가 한국과 일본 정치권력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권력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쟁점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국민이 동의하든 않든 이미 내린 정답은 무조건 시행한다. 일방통행이다.

더욱이 이들 권력자들은 ‘창조경제’ ‘통일대박’ ‘일억 총활약’(일본) 등 모호한 장밋빛 슬로건을 쉼 없이 내걸어 국민을 현혹한다. ‘빵과 서커스’로 상징되는 우민화 정책의 다른 버전이다. 그리고 툭하면 슬로건을 바꿔가며 대중들이 무의식 중에 갖고 있는 지성에 대한 증오를 조작, 동원해 정적들을 무장 해제한다. 일부 언론들은 조금이라도 지성적인 것이 나오면 거침없이 ‘핵노잼’ ‘설명충’ 등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오명을 덮어씌운다. 이런 무지막지한 권력정치에 일부 ‘지성인’을 자처하는 인사들이 ‘묻지마’ 불나방이 되어 반지성주의를 밀어붙인다.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포함한 일련의 소동은 결코 ‘역사전쟁’이나 ‘이념대결’이 아니다. 지성과 반지성의 대결, 즉 인간 이성을 다투는 문제다. 반지성주의를 퇴치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국민이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알아차리고 깨어나 이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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