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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야당의 기ㆍ승ㆍ전ㆍ재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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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 앞두고 나온 야당의 재벌개혁
모든 문제가 오로지 재벌 탓이란 식
이런 낡은 프레임으로 집권가능할지
국정감사를 앞두고 야당이 다시 재벌개혁론을 들고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주장을 반복하고 확대할 때마다 드는 느낌은 답답함과 식상함이었다. 야당은 정부여당의 노동개혁 드라이브에 대항할 수 있는 카드, 그리고 내년 총선까지 먹힐 수 있는 카드가 재벌개혁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과연 대다수 국민들도 거기에 동의할 지 의문이 든다.
우선 진단과 처방이 단순 명료하다 못해 너무 심플하다. 한국경제 모든 병폐의 근원이 재벌인 만큼 재벌개혁만이 결국 만병통치약이란 논리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자리 해법. 삼성 현대차 SK등 10대 재벌이 쌓아둔 사내 유보금이 현재 500조 원이 넘는다. 이중 1%만 꺼내 쓴다면 늘 계약해지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50만 명을 질 좋은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백수’ 혹은 ‘미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청년 30만 명에게 월급 200만 원짜리 일자리를 줄 수 있다(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고 한다. 재벌이 금고만 열면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 문제 대부분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영세자영업이나 내수 살리기도 마찬가지다. 재벌들이 면세점부터 골목상권까지 모조리 장악하니까 중소매장, 동네슈퍼, 빵집들이 문을 닫는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중소기업 노동자들, 영세자영업자, 그리고 자영업 외엔 달리 선택지가 없는 은퇴 베이비부머까지 모조리 생계위기에 처해있다. 따라서 재벌의 영위업종이나 지역을 묶으면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자들의 생존터전이 확보될 것이고, 이를 통해 이들의 고용과 소득이 보장되면 소비가 늘어나면 내수도 회복될 수 있다는 논리다.
세수부족과 복지확충, 재정건전성도 같은 식으로 해결된다. 세입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복지수요를 감당하며 재정안정도 유지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며, 무엇보다 16% 밖에 되지 않는 실효세율로 사실상 특혜를 받고 있는 재벌대기업 법인세부터 인상해야 한다.
100% 틀린 얘기는 아니다. 땅콩회항부터 롯데 형제의 난까지 재벌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고, 그런 만큼 재벌개혁의 당위성을 부정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재벌의 금고만 열면, 재벌의 손발만 묶으면, 재벌의 세금만 올리면 모든 게 치유될 만큼 한국경제가 앓고 있는 병은 간단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돈 벌어 쌓아두지 말고 제발 투자 고용에 쓰라는 건 정부여당 역시 툭하면 던지는 주문이지만, 기업유보금이 곳간에 쌓아둔 현찰도 아니고 더구나 그 1%로 수십만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다는 건 경제학 아닌 산수에 가까운 계산법이다. 재벌의 독과점구조는 고쳐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중소 면제점을 시내 요지에 10개쯤 열어준들 명품 사러 온 유커들이 롯데면세점이나 신라면세점으로 가던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재벌빵집의 문을 닫게 한다고 해서, 롯데마트나 이마트 추가개점을 막는다고 해서, 이미 굳어진 소비자들의 구매패턴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소수지분을 가진 재벌총수의 전횡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순환출자부터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순환출자를 없애고 지주회사체제를 갖춘 대기업에도 황제경영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야당의 재벌개혁론은 패배했던 2012년 대선 때 메뉴 그대로다. 무슨 문제를 대입하든 기-승-전 다음의 결론은 재벌개혁이다. 방향과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여당은 공공개혁에서 공무원연금개혁, 노동개혁까지 개혁의제를 선점하며 질주를 거듭하고 있는데 야당은 3년 전에도, 1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재벌개혁 도식 안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경제정당으로 환골탈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내용을 들여다 봤더니 결국은 재벌개혁 얘기뿐이었다. 더 이상 고민을 하기가 귀찮거나, 아니면 태생적으로 창의성이 없거나 그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정말로 재벌을 개혁하고 싶으면 야당은 집권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낡고 도식적인 이런 재벌개혁론으론 좀처럼 집권 자체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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