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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탄 배 침몰… 서해훼리호 악몽 되살아나"

입력
2014.04.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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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10월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현장. 인양선인 설악호의 철제로프에 묶여 물위로 일주일만에 모습을 드러낸 서해 훼리호. 그러나 강풍과 거센 파도에 로프가 끊어져 인양된지 12시간만에 다시 침물하고 말았다. / 1994년 10월 17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4-04-16(한국일보)
93년10월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현장. 인양선인 설악호의 철제로프에 묶여 물위로 일주일만에 모습을 드러낸 서해 훼리호. 그러나 강풍과 거센 파도에 로프가 끊어져 인양된지 12시간만에 다시 침물하고 말았다. / 1994년 10월 17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4-04-16(한국일보)

“저 학생들, 부모들 어쩐다냐….”

수학여행길에 오른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6일 전북 부안군 위도 주민 신명(57)씨는 또 한번 속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신씨는 21년 전 292명의 생명을 앗아간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로 막내 동생을 잃었다. 동생은 8남매 중 막내로 맏이인 신씨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다. 사고 당시 아깝디 아까운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안전 수칙을 무시해 발생한 대표적인 인재(人災)로 꼽힌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10분께 위도의 벌금항을 출발해 뱃길로 10분 거리인 식도항을 거쳐 오전 9시50분께 파장금항에서 승객을 태우고 뭍(격포항)으로 출발했다.

이 배는 식도를 거치면서 이미 정원(221명)을 초과했다. 파장금항을 뜰 때는 정원보다 141명이나 많은 362명(승객 355명, 선원 7명)이 배에 올랐다. 갑판과 선실 어느 곳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기상도 나빴다. 신씨는 “가을로 접어든데다 그날 따라 유난히 강풍이 불어 ‘파도가 심할 텐데…’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며 “아무리 하루 한번 뭍으로 나가는 배지만 그런 날씨에 배를 띄울 줄은 몰랐다”고 기억했다. 당일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행해 선박에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런데 배에는 항해사가 없었다. 항해사가 휴가 중이어서 갑판장이 대신했다. 수백 명이 오르는 배인데도 안전요원은 겨우 2명이었다. 결국 20여분 간 4㎞를 항해하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회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높은 파도를 맞고 무게중심을 잃어 배가 침몰했다.

이날 인천에서 세월호를 타고 제주로 향하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 등 승객 200여명의 생사가 사고 발생 수시간이 지나도록 확인되지 않으면서, 21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 나고 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출항 시간이 예정보다 2시간 지연됐고, 이 때문에 제주 도착 시간을 맞추려 항로를 이탈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와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신씨는 “그 끔찍한 사고가 난 지 20년이나 지났는데도, 대형 여객선 사고가 나다니 너무 안타까워 가슴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여객 문화가 확산돼 대형 여객선이 늘어났는데도, 안전 교육은 여전히 부실하다고 지적한다. 공길영 한국해양대 항해학부 교수는 “현재까지 상황으로 보면 화물 폭발로 내부 선체가 손상됐거나 암초에 충돌됐거나 둘 중 하나가 원인으로 보인다”며 “어느 경우라도 결국은 운항자가 여객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공 교수는 이어 “여객선 안전관리가 중요한데도 여객선 승무원 안전교육은 일반 상선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기초안전 교육, 직급이 올라갈 때 받는 직무 안전교육이 전부”라며 “정기 여객선은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여객선 승조원에 대한 특별 안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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