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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전근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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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근대국가 발전사 관련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절대주의 왕정 체제를 벗어나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국가가 탄생하고, 또 그 체계를 갖추기까지의 세부적인 내용이야 잊은 지 오래됐지만,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있다. 한국은 근대(近代·모던)와 탈근대(포스트모던), 그리고 전근대가 공존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근대국가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민족국가의 성립(통일)인데, 한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그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전근대적 분단 상황에서 민주주의 정체를 유지하며 포스트모던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한국인이란 얘기다.
‘지식의 변비’ 같은 이 생각이 다시 떠오른 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나서다. 계엄 체제에선 심야 통행금지가 생기고, 언론 통제를 위해 계엄군이 언론사를 장악할 것이란 생각에 계엄 선포 담화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회사로 들어가는 택시 안이었다. 근대와 탈근대가 뒤섞인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계엄이 전근대적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폭주하는 거대 야당에 경고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는 윤 대통령 발상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겠다. 다만, 헌법에 계엄 등 국가긴급권을 명문화한 건 전쟁이나 내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같은 경제공황 등 비상사태로 사회 질서 유지가 어려울 때 혼란을 빠른 시간 내 정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거 왕정 체제에서 폭군이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신하들을 겁박하기 위해 병사들의 창칼로 둘러싸고 협박하는데 쓰라고 주어진 권한은 아니란 얘기다.
계엄 선포 이후 드러나고 있는 얘기들에 더 아연실색하게 됐다. 탄핵소추된 검찰총장 출신 윤 대통령은 법으로 정해둔 절차에 응하지 않고, 법원과 수사기관, 헌법재판소의 해당 절차가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엄을 사전 모의한 이 중 하나는 점집을 차리고, 수차례 계엄 성패를 무속인에게 물었다고 한다. 계엄과 무속 사이 상관관계는 전혀 모르겠지만, 대선 기간 ‘왕’(王)을 손바닥에 새기고 유세에 나섰던 윤 대통령이 전근대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또 이상하지만은 않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분단이라는 전근대적 요소는 당분간 어쩔 수 없겠지만 근대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기반 중 하나인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걸 보고 싶다. 적어도 법률전문가인 한 나라의 대통령이 차벽과 철조망 안에서 버티고 있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검찰 수장의 정계 입문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만류에도 ‘오죽하면 이러겠냐’고 나서서 대권을 잡았지만, 이제는 '오죽하면'이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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