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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계속 이사할 수도 없고'...기후변화에 일터 떠밀리는 농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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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긴 제가 있을 때까진 괜찮지 않을까요."
강원 양구군에 터를 잡은 지 올해로 6년째인 박현수(60)씨. 그는 '사과 이주' 1세대 격이다. 전에 그는 사과 주산지인 경북 영천시에서 10년 넘게 과수원을 운영했다. 밭 넓이만 11만5,700㎡(약 3만5,000평)에 달했을 정도로 규모도 컸다.
박씨의 사과 이주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그가 영천을 떠났던 해는 2020년. 당시 여름은 도깨비 날씨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6월에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오더니, 그다음 달은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할 정도로 기나긴 장마가, 8월에는 다시 폭염과 열대야가 극심해졌다. 기온에 예민한 사과에 최악의 여건이었다. 그해 박씨가 수확한 사과 30%가 색이 바랬다고 한다. 이런 상처 난 사과는 20㎏ 한 상자당 1만 원을 받고 농협에 파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비료값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양구로 넘어온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그가 재작년에 재배한 양구 사과는 10㎏당 최고 22만 원까지 거래됐다. 통상적인 도매가격의 4배가 넘는 가격이다. 작년에도 동일한 무게로 14만 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영천에 비해 양구의 위도와 고도 모두 높아 폭염과 열대야 등 이상 고온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씨의 기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작년에 양구도 기온이 많이 오른 탓이다. 그는 "기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모르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40년은 이곳에서 사과농사를 지을 수 있겠지만, 자식세대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이 기후변화에 등 떠밀리고 있다. 누군가는 낯선 곳으로 터전을 옮겼고, 어떤 사람은 밭을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아직 밭에 남아 있는 이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농산물 가격은 올랐지만, 흉작 직격탄을 맞은 영세 농민들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다.
실제 농가소득은 2005년 2,578만 원, 2015년 3,410만 원, 2023년 5,083만 원으로 증가했으나, 농업생산활동을 통해 발생한 농업소득은 같은 기간 1,182만 원, 1,126만 원, 1,114만 원으로 되레 낮아지는 실정이다. 최근 농협중앙회 미래전략연구소가 발행한 '계간 NH농협 조사연구'는 "폭염, 한파, 가뭄, 집중호우, 병충해 등 이상 기후의 일상화로 농업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안정적인 농업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일보가 인터뷰한 과일·채소 재배 농민 11명은 "이대로면 농산물도 농민도 한국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주는 이미 현실이다. 특히 과일 재배 농민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된 지 오래다. 날씨가 더워지며 재배 가능 지역이 줄어든 탓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30년대 사과 재배 가능 지역은 현재의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고, 2090년대에는 국내 사과가 사실상 소멸한다. 온난화 여파로 재배한계선이 북상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여름철 영천의 평균 온도는 1972년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높았던 25.9도로, 사과 생육 적정온도인 18~24도를 상회했다. 배와 복숭아, 포도의 재배지도 사과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농가에서는 최근 2년이 유달리 심각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작년에는 유례없던 '가로 터짐(열과)' 현상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다. 통상 열과 과일은 꼭지 주변이 갈라지는 반면, 작년엔 과일 옆구리가 터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렇게 터져버린 과일은 금방 썩는 바람에 판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열과의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고온이다. 김종우 한국새농민 제주도회 부회장은 "작년 8, 9월에 폭우와 폭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레드향 껍질의 수분이 모두 증발되고, 광합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바람에 열과가 생긴 것"이라며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농가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해안가 농가들 중에선 레드향 수확량이 반토막 난 곳도 있고 심지어 열매가 하나도 맺히지 않은 나무도 있었다"고 전했다.
흉작은 수치상으로도 확인된다. 제주도 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작년 10월 중순 레드향 열과 피해율은 전체 재배 면적의 37%에 달했다. 이는 2023년 피해 규모였던 25.8%보다 11.2%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전국 사과 농가의 20~30% 정도도 마찬가지로 열과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들은 이주를 서두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경북 사과 농가 수는 전년 대비 7.0% 감소한 1만8,164가구였다. 10년 전(2만3,349가구)보다 무려 22.2% 줄어든 것이다. 줄어든 사과 농가는 북쪽으로 이주했는데, 같은 해 강원도 사과 농가 수는 전년 대비 1.2% 증가한 2,115가구로 집계됐다. 1,414가구였던 2013년과 비교하면 49.6%가 급증했다.
다른 농작물로 바꿀 수도 있겠으나, 농민들에게 작물 변경은 일반인들의 직업 전환과도 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주를 해서라도 재배 작물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걸림돌은 돈과 시간이다. 농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과 과수원 조성 비용은 3.3㎡(약 1평)당 5만 원 정도다. 통상 과수원 면적이 9,900㎡(약 3,000평)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초기 투자 비용으로만 1억5,000만 원이 넘게 든다. 갓 식재한 나무가 상품 가치가 있는 열매를 맺는 데 걸리는 시간은 통상 3년. 시간과 돈이 없다면 기후변화 이주는 언감생심이라는 얘기다.
이 탓에 아직 터전을 못 떠난 농민들은 고민이 깊다. 경북 청송군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김태현(61)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농사 상황을 도박판에 비유했다.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수확량 예측이 무의미했다는 뜻이다. 김씨는 "사과나무 4,000그루 중 200그루가 작년 봄 동해(추위 피해)를 당했다"며 "앞으로 15년은 더 농사를 지어야 할 텐데 여기에서 계속할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감이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의 대응은 농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할당관세 등 장바구니 물가를 낮추는 데만 초점을 맞추지, 정작 농가 피해는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여름 폭염으로 참외 수확량이 30% 급감한 경북 성주군 출신 농민 이재동(57)씨는 "정부는 먹거리 가격을 낮추려고만 하지, 정작 이 과정에서 손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해주는 것은 없다"며 "이상 기후 문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영세농민들은 해가 갈수록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선 농가 설비 보강이 필수적인데, 비용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로 12년째 딸기를 재배 중인 김성일(51)씨는 "농촌진흥청을 가보니 시설 내 에어컨 설치가 폭염 대책이라는데, 현실적으로 비용이 부담스럽다"며 "적어도 전체 설치 비용의 40%는 농가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라 금전적 압박이 엄청나다"고 토로했다.
강원 정선군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40대 김선태씨도 "예전에는 생산량이 급감해도 정부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줬는데, 지금은 다 삭감됐다"며 "농민 개인이 기후위기 문제를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정작 폭염이 극심했던 재작년과 작년에 정부 지원은 형편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 해 작황에 생계가 달린 농가에 기후변화가 가져온 불확실성은 두려움이다. '올해도 폭염(혹은 한파·가뭄·집중호우)이 닥치면 어떡하나'라는 불안이 최근 몇 년째 이어진다. 정부 지원마저 줄면서 최근 농업 포기를 염두에 두는 농민도 꽤 늘었다. 영천에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는 조광현(60)씨는 "이제 와서 지역을 옮긴다고 해도, 언제까지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과수 재배가 시한부 운명이다 보니, 나이 든 사람들은 과수원을 아예 포기해버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농업 이탈'은 이미 시작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농가 인구는 전년 대비 3.5% 감소한 208만8,781명이었다. 농업인구 고령화(65세 이상 농업인 52.6%)까지 가속화하고 있어 200만 명이 무너지는 것은 머지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NH농협 조사연구는 올해 농정 여건 서두에 "기후위기, 인구구조 변화, 농업소득 하락이라는 삼중고는 농업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위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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