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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가 내 말 엿듣는다" 소송, 애플이 1400억 원에 합의한 이유는

입력
2025.01.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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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시리 녹음 음성, 성능 개선에만 사용
2019년부터 동의 없이 안 해"
미국서 제기된 '3자 그레이딩' 소송, 피해 입증 곤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10일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 캠퍼스에서 열린 세계개발자회의(WWDC) 2024에서 새 제품을 발표하고 있다. 쿠퍼티노=AP 뉴시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10일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 캠퍼스에서 열린 세계개발자회의(WWDC) 2024에서 새 제품을 발표하고 있다. 쿠퍼티노=AP 뉴시스


애플아이폰 등에 탑재한 음성 비서 서비스 '시리(Siri)'가 개인의 대화를 엿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마케팅에 이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애플은 8일 언론에 배포한 입장문을 통해 "시리 데이터는 마케팅 프로필 구축을 위해 쓰인 적이 없고 어떤 목적으로도 결코 타인에게 판매된 적도 없다"고 전했다.

애플이 이 같은 입장을 내놓은 건 앞서 애플이 시리를 통해 개인정보를 몰래 모았다며 제기된 미국 내 집단 소송에서 애플이 소비자들에게 9,500만 달러(약 1,400억 원)를 지급하는 합의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개인정보보호위원회도 시리 기능에 의한 한국 소비자의 피해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애플은 합의가 제기된 의혹을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 등 해외 언론에 따르면 실제 이 합의안은 애플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는' 소송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재판을 진행 중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지방 법원이 합의안을 승인하면 2014년 9월 17일~2024년 12월 31일에 시리를 이용했고 "의도치 않은 시리 활성화"가 발생했다는 것이 입증된 소비자는 애플에 손해 배상으로 20달러를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시리 성능 고도화 위한 '그레이딩', 사람이 녹음 받아쓰고 녹취 결과와 비교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담당 수석부사장이 2018년 6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애플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음성 인식 비서 '시리'의 기능을 설명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담당 수석부사장이 2018년 6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애플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음성 인식 비서 '시리'의 기능을 설명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애플이 잘못한 것이 없다면 왜 '합의'를 하는 것일까. 애플 관계자는 "2019년 당시 해소한 3자 그레이딩(grading)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 사건을 합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플의 설명처럼 이 집단 소송의 시작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내부 고발자를 인용해 시리와 애플 워치를 비롯한 애플 기기가 의도치 않게 녹음한 음성을 애플이 제3자에게 전달했다고 지적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그레이딩'이란 작업을 위해서다. 그레이딩이란 시리 이용자의 녹음된 음성 내용을 애플 직원이 듣고 문장으로 바꾼 뒤 인공지능(AI)이 같은 음성을 문장으로 바꾼 결과와 비교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애플은 기계 학습 과정에서 시리가 음성을 문자로 바꾸는 정확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이 같은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3자 그레이딩'이란 애플이 아닌 외부 계약 업체를 동원해 작업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용자 동의 없이 녹음한 음성을 애플이 아닌 제3자에게 전달된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로 연결될 소지가 있었다.

당시 애플은 이 작업을 오로지 시리의 성능 개선을 위해서만 이용했고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간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지만 소비자의 비판이 쏟아지면서 그레이딩을 중단하고 오디오 녹음 자료도 보관하지 않기로 했다. 애플은 이후 시리 이용자 중 원하는 이들만 시리의 성능 개선을 위해 오디오 샘플을 제공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또 오디오 샘플 제공에 동의한 경우라도 의도하지 않게 시리를 호출한 것으로 판단되는 녹음 자료는 삭제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애플 관계자는 "시리 개선을 위해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으며 개인정보를 더욱 긴밀하게 보호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그레이딩 작업을 하는 건 애플만이 아니다.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 '알렉사' 등 다른 음성 비서들도 성능 개선을 위해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 때문에 구글 또한 애플과 유사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네이버도 AI 스피커 '클로바'를 통해 녹음한 내용을 성능 개선을 위해 사용한다. 네이버는 이를 프라이버시 정책을 통해 공개하고 있으며 수집 동의 여부를 묻고 있다.

(관련 기사: 본보 2019년 9월 3일 자 1면 '애플 이어 네이버도… AI-이용자 대화 엿들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9021433049637


너무 절묘한 광고.. "피해 입증" 어려워


2020년 가전·IT 전시회 'CES 2020'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구글 어시스턴트를 상징하는 '헤이 구글' 문구가 설치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20년 가전·IT 전시회 'CES 2020'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구글 어시스턴트를 상징하는 '헤이 구글' 문구가 설치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실제 인터넷 이용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특정한 행동을 했더니 그 행동과 연관된 광고가 나왔다"는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전자 장치가 나를 엿듣고 있다'는 의심과 연결되는데 그레이딩 폭로는 이런 의심을 강화해 소송으로까지 연결됐다. 하지만 애플 소송을 다룬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에 따르면 원고들은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녹음을 애플이 보유하고 있었던 데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파기됐기 때문에 실제 어떤 음성이 동의 없이 녹음됐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거대 기술기업(빅테크)의 개인정보 수집 기술이 너무 만연해 있고 소비자들이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 채 이에 동의한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빅테크는 구태여 불법 도청을 하지 않더라도 합법적으로 수집한 여러 정보를 조합해 '타깃 광고'를 내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 전자프런티어재단(EFF)의 신디 콘 집행국장은 복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데이터 수집의 끊임없는 침해를 막아야 하는 책임이 이용자 개인에게만 전가돼서는 안 된다"며 "모든 기기는 적절한 개인정보 보호 기능을 제공해야 하며 이를 규정하는 개인정보보호법도 고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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