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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할아버지의 청재킷이 20대 손자 옷으로... 알록달록 '수선'의 마법

입력
2025.01.02 20: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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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기쁨' 뜨개 공예가 제타 안
"새해엔 알록달록 뜨개 어때요?"
"느려도, 모양 엉성해도 나만의 멋"

제타 안이 알록달록한 털실로 수선한 가방, 신발, 옷들. 제타 안 제공

제타 안이 알록달록한 털실로 수선한 가방, 신발, 옷들. 제타 안 제공

뜨개 수선 공예가 제타 안(안미영·54)씨의 일상은 알록달록 총천연색이다. 스웨터, 청바지, 재킷, 양말, 운동화, 장갑, 가방, 컵 받침, 방석, 소파, 바이올린 손잡이, 반려견 산책줄···. 옷, 가방부터 생활용품까지 집 안의 손 닿는 모든 곳에 형형색색 털실들이 존재감을 뽐낸다. 모두 안씨가 낡은 물건에 털실로 덧대거나 꿰매 수선한 흔적이다. 값싸고 질 좋은 새 상품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 고쳐 입고 다시 쓰는 삶이란 종종 미련하고 궁색한 일로 치부되지만, 그에겐 창작하는 기쁨을 주는 하나의 놀이다. 소비 위주의 삶을 잠시 멈추는 의식이기도 하다.

최근 '수선의 기쁨'을 출간한 그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제게 뭔가를 고치고 변화시키는 일은 멋과 사랑이 잔뜩 담긴 즐거움"이라며 "특히 뜨개질은 털실과 바늘만 있으면 나만의 예술적 수선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20, 30대 '뜨개질 멍'에 힐링

삼남매가 제타 안이 뜨개로 수선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큰딸(왼쪽)이 입고 입는 멜빵바지는 제타 안이 20대 때 구매한 옷. 주황색 털실로 주머니를 달아 리폼했다. 둘째 아들(오른쪽)이 입은 청재킷은 제타 안의 아버지가 입었던 옷을 고친 것이다. 제타 안 제공

삼남매가 제타 안이 뜨개로 수선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큰딸(왼쪽)이 입고 입는 멜빵바지는 제타 안이 20대 때 구매한 옷. 주황색 털실로 주머니를 달아 리폼했다. 둘째 아들(오른쪽)이 입은 청재킷은 제타 안의 아버지가 입었던 옷을 고친 것이다. 제타 안 제공

안씨 집 물건의 연식은 평균 20, 30년이 우습다. 장갑 한 짝부터 소파까지 닳고 해지고 찢어져도 쉽게 버리지 않아서다. 장롱 속엔 3대를 거쳐 입은 옷도 수두룩하다. 그가 20대 때 구입한 니트와 청바지는 수선해 20대인 큰딸과 함께 입는다. 아흔이 된 아버지가 젊은 날 입었던 양 소매가 사라진 청재킷도 20대인 둘째 아들 옷으로 재탄생했다. 수선이 습관이 되면, 쓰레기가 줄어든다. 날로 늘어가는 의류 폐기물을 고민하는 환경단체들이 수선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제타 안이 알록달록한 털실로 수선한 소파와 보드 장갑. 제타 안 제공

제타 안이 알록달록한 털실로 수선한 소파와 보드 장갑. 제타 안 제공

안씨도 환경단체 '다시입다연구소'에서 뜨개 수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시기를 지나며 20, 30대 중심으로 뜨개 인구가 급증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몰입하는 경험,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손놀림이 그의 큰딸 말을 빌리면 '명상'과 같단다. 요즘은 물건이 낡아 못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워크숍에는 유행이 지났거나 질린 물건을 들고 오는 리폼 수요가 더 많다. 안씨는 "오래 입어 식상한 옷에 주머니만 뜨개로 달아줘도, 새 옷 같은 느낌을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는 왜 무채색만 고를까

제타 안씨의 뜨개 수선은 색감은 화려하고 방법은 과감하다. 그는 워크숍 참가자들에게도 "정해진 틀을 깨라"고 강조한다. 본인 제공

제타 안씨의 뜨개 수선은 색감은 화려하고 방법은 과감하다. 그는 워크숍 참가자들에게도 "정해진 틀을 깨라"고 강조한다. 본인 제공

안씨의 뜨개 수선은 색감도 방법도 과감하다. 수선이란 모름지기 한 듯 안 한 듯 하는 게 암묵적 규칙. 하지만 그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튀는 색깔 털실로 티 나게 고친다. 털실마다 라벨에 적힌 권장 바늘 크기도 무시하기 일쑤다. 무규칙 뜨개라고나 할까. 이런 작업 방식은 자유로운 삶의 태도와 닮았다. 그는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하고,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 일했다. 결혼하고 카페를 운영하다 6년 전, 충남 논산으로 귀촌했다. 성인이 된 두 자녀에 이어 늦둥이 막내까지 홈스쿨링 중이다.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원하는 색상을 고를 수 있게 했더니 대부분은 무채색, 무난한 색만 쓰더라고요. 베이지, 브라운, 카키 같은 색이요. 그래서 화려하고 다양한 색을 조합한 털실만을 제공해서 선택지를 아예 좁혔어요. 튀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뜨개에서만이라도 "틀을 깨보라"고 말했다. "느려도 괜찮아요. 모양이 엉성해도 내 멋이에요.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상관없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색으로 나를 표현해 보세요."

수선의 기쁨· 제타 안 지음· 아이오와 발행· 164쪽·1만9,000원

수선의 기쁨· 제타 안 지음· 아이오와 발행· 164쪽·1만9,000원






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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