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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통 들고 가는 이 카페, 악평 딛고 한국서 7년 버틴 비결

입력
2024.12.18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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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현희 '얼스어스' 대표 카페 생존기 출간
'다회용기' 대중화...한국 카페 문화 바꿔
크리스마스엔 케이크 김치통에 담아가

얼스어스의 딸기 케이크가 김치통 안에 포장돼 있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얼스어스의 딸기 케이크가 김치통 안에 포장돼 있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여기 선민의식 쩐다('심하다'의 속어)."

국내 최초 일회용품 없는 무포장 카페인 '얼스어스'를 운영하는 길현희(33) 대표는 6년 전 포털 사이트 후기에 올라온 한 고객의 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환경을 생각해 일회용 컵, 플라스틱 빨대, 냅킨을 모조리 금지하자 고객들은 불친절하다는 악평을 넘어 '유난 떤다' '가르치려 든다'는 불쾌감을 토로했다.

국내 최초 일회용품 없는 카페 '얼스어스'

그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얼스어스가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 33㎡(약 10평) 남짓한 공간에 문을 연 지 7년이 지난 지금,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은 가치의 영역에서 생존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제는 국내 어떤 카페에서도 매장에서 일회용 컵을 쓸 수 없다. 얼스어스와 같은 작은 실천과 외침이 모여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내 최초 제로 웨이스트 카페인 얼스어스의 길현희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얼스어스 서촌점에서 일회용 랩 대신 실리콘 랩을 사용하고 있다. 얼스어스는 판매 단계뿐만 아니라 제품 제작 단계에서도 일회용품 발생량을 최소화한다. 류기찬 인턴기자

국내 최초 제로 웨이스트 카페인 얼스어스의 길현희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얼스어스 서촌점에서 일회용 랩 대신 실리콘 랩을 사용하고 있다. 얼스어스는 판매 단계뿐만 아니라 제품 제작 단계에서도 일회용품 발생량을 최소화한다. 류기찬 인턴기자

카페 운영 기록을 담은 '용기 있게 얼스어스'를 최근 출간한 길 대표를 16일 만나 카페 생존기를 들었다. 대학에서 광고학을 전공한 길 대표는 대학생 때 카페 투어를 하며 다회용기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좋아하던 커피로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일회용 컵에 종이 홀더를 끼우는 게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이를 보이콧한다는 마음도 담았다. SNS 보이콧 운동에서 아예 제로 웨이스트 카페 창업으로 확장했다. 얼스어스는 For Earth For Us(지구를 위한 게 우리를 위한다)를 줄인 말이다. 카페는 현재 2호점(서촌점)까지 확장했고, 직원도 10명으로 늘었다.

얼스어스에서 디자인한 케이크들. 비닐 짤 주머니를 사용하지 않고 숟가락이나 스쿠프로 생크림 모양을 낸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얼스어스에서 디자인한 케이크들. 비닐 짤 주머니를 사용하지 않고 숟가락이나 스쿠프로 생크림 모양을 낸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얼스어스에서는 일회용 컵이나 홀더, 포장봉투 등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다회용기를 사용한다. 판매 단계뿐 아니라 음료나 케이크를 만들 때도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한다. 보통 제과제빵을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선 주방에서도 일회용품이 대량 발생한다. 비닐로 된 생크림 짤 주머니, 반죽을 숙성시킬 때 필요한 랩, 유산지 등이다. 얼스어스에선 케이크 위에 생크림으로 모양을 낼 때 짤 주머니 대신 숟가락이나 스쿠프를 사용한다. 과일을 세척한 뒤 남은 물기도 키친타월 대신 거즈를 빨아 닦는다. 일회용품을 안 쓰면 운영자도 번거롭다.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지구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제 친구들의 자녀 세대는 지구에서 살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당장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일회용품을 덜 쓰는 것이고 그 습관이 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얼스어스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양은 일반 카페의 10분의 1 수준. 20리터 쓰레기 봉투를 며칠 동안 쓸 정도다. 길 대표는 "우유 같은 분리 배출해야 하는 재료 자체의 포장 쓰레기 외에는 쓰레기가 거의 안 나온다"고 했다.

밥통, 김치통에 케이크 담아 간다

얼스어스의 케이크를 포장해 갈 때는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반찬통 뚜껑에다 케이크를 올려 놓고 그다음 통을 뚜껑처럼 덮어 들고 간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얼스어스의 케이크를 포장해 갈 때는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반찬통 뚜껑에다 케이크를 올려 놓고 그다음 통을 뚜껑처럼 덮어 들고 간다. 얼스어스 인스타그램

카페를 운영하며 고비도 많았다. 가장 위태로웠던 건 코로나19 유행으로 매장 영업이 금지됐을 때다. 대다수 자영업자가 일회용품으로 배달해 간신히 수입을 유지했지만 배달을 하지 않는 얼스어스는 기댈 곳이 없었다. 일 매출이 수만 원에 불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임대료는 연체되고, 직원의 90%를 무급휴가로 돌렸다.

길 대표는 원칙을 고수했다. 수익성이 좋은 케이크를 친환경으로 분류되는 종이박스에 담아 팔 법도 한데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배달이 안 되고 포장이 쉽지 않으니 수익에 한계가 있는 구조"라면서도 "케이크 하나, 음료 하나 덜 팔아도 매출보다는 쓰레기를 덜 만든 나를 뿌듯하게 여긴다"고 강조했다.

길현희 얼스어스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얼스어스 서촌점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길현희 얼스어스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얼스어스 서촌점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젊은 사장의 뚝심은 파급력이 컸다. '다회용기'라는 단어도, '용기내(다회용기로 포장해 가는 운동)' 캠페인도 모두 얼스어스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런 말이 일상 용어처럼 쓰이는 걸 보면 가끔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막 콩닥콩닥 뛴다"며 "다회용기 쓰기, 플라스틱 빨대 없애기 등 한국 카페 문화가 긍정적으로 바뀐 걸 보면 보람이 크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때 그의 노력은 진가를 드러낸다. 고객들이 미리 예약한 케이크를 다회용기에 담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냄비, 반찬통은 물론 밥통 내솥, 김치통까지 들고 온단다. 길 대표는 "올해는 어떤 용기가 등장할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세상을 가장 빨리 확실히 바꿀 수 있는 게 인식의 변화인 것 같다"며 "얼스어스가 오래 버티면서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한국의 카페 문화를 바꿔 나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용기 있게 얼스어스·길현희 지음·유유히 발행·260쪽·1만8,000원. 유유히 제공

용기 있게 얼스어스·길현희 지음·유유히 발행·260쪽·1만8,000원. 유유히 제공







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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