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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통 들고 가는 이 카페, 악평 딛고 한국서 7년 버틴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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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선민의식 쩐다('심하다'의 속어)."
국내 최초 일회용품 없는 무포장 카페인 '얼스어스'를 운영하는 길현희(33) 대표는 6년 전 포털 사이트 후기에 올라온 한 고객의 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환경을 생각해 일회용 컵, 플라스틱 빨대, 냅킨을 모조리 금지하자 고객들은 불친절하다는 악평을 넘어 '유난 떤다' '가르치려 든다'는 불쾌감을 토로했다.
그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얼스어스가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 33㎡(약 10평) 남짓한 공간에 문을 연 지 7년이 지난 지금,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은 가치의 영역에서 생존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제는 국내 어떤 카페에서도 매장에서 일회용 컵을 쓸 수 없다. 얼스어스와 같은 작은 실천과 외침이 모여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카페 운영 기록을 담은 '용기 있게 얼스어스'를 최근 출간한 길 대표를 16일 만나 카페 생존기를 들었다. 대학에서 광고학을 전공한 길 대표는 대학생 때 카페 투어를 하며 다회용기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좋아하던 커피로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일회용 컵에 종이 홀더를 끼우는 게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이를 보이콧한다는 마음도 담았다. SNS 보이콧 운동에서 아예 제로 웨이스트 카페 창업으로 확장했다. 얼스어스는 For Earth For Us(지구를 위한 게 우리를 위한다)를 줄인 말이다. 카페는 현재 2호점(서촌점)까지 확장했고, 직원도 10명으로 늘었다.
얼스어스에서는 일회용 컵이나 홀더, 포장봉투 등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다회용기를 사용한다. 판매 단계뿐 아니라 음료나 케이크를 만들 때도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한다. 보통 제과제빵을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선 주방에서도 일회용품이 대량 발생한다. 비닐로 된 생크림 짤 주머니, 반죽을 숙성시킬 때 필요한 랩, 유산지 등이다. 얼스어스에선 케이크 위에 생크림으로 모양을 낼 때 짤 주머니 대신 숟가락이나 스쿠프를 사용한다. 과일을 세척한 뒤 남은 물기도 키친타월 대신 거즈를 빨아 닦는다. 일회용품을 안 쓰면 운영자도 번거롭다.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지구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제 친구들의 자녀 세대는 지구에서 살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당장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일회용품을 덜 쓰는 것이고 그 습관이 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얼스어스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양은 일반 카페의 10분의 1 수준. 20리터 쓰레기 봉투를 며칠 동안 쓸 정도다. 길 대표는 "우유 같은 분리 배출해야 하는 재료 자체의 포장 쓰레기 외에는 쓰레기가 거의 안 나온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며 고비도 많았다. 가장 위태로웠던 건 코로나19 유행으로 매장 영업이 금지됐을 때다. 대다수 자영업자가 일회용품으로 배달해 간신히 수입을 유지했지만 배달을 하지 않는 얼스어스는 기댈 곳이 없었다. 일 매출이 수만 원에 불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임대료는 연체되고, 직원의 90%를 무급휴가로 돌렸다.
길 대표는 원칙을 고수했다. 수익성이 좋은 케이크를 친환경으로 분류되는 종이박스에 담아 팔 법도 한데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배달이 안 되고 포장이 쉽지 않으니 수익에 한계가 있는 구조"라면서도 "케이크 하나, 음료 하나 덜 팔아도 매출보다는 쓰레기를 덜 만든 나를 뿌듯하게 여긴다"고 강조했다.
젊은 사장의 뚝심은 파급력이 컸다. '다회용기'라는 단어도, '용기내(다회용기로 포장해 가는 운동)' 캠페인도 모두 얼스어스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런 말이 일상 용어처럼 쓰이는 걸 보면 가끔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막 콩닥콩닥 뛴다"며 "다회용기 쓰기, 플라스틱 빨대 없애기 등 한국 카페 문화가 긍정적으로 바뀐 걸 보면 보람이 크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때 그의 노력은 진가를 드러낸다. 고객들이 미리 예약한 케이크를 다회용기에 담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냄비, 반찬통은 물론 밥통 내솥, 김치통까지 들고 온단다. 길 대표는 "올해는 어떤 용기가 등장할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세상을 가장 빨리 확실히 바꿀 수 있는 게 인식의 변화인 것 같다"며 "얼스어스가 오래 버티면서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한국의 카페 문화를 바꿔 나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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