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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대왕고래' 꺼낸 尹...답답한 공무원들 "예산 논의 과정 잘 몰라...현실과 차이 크다"

입력
2024.12.04 17: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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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직접 발표한 대왕고래 예산 98% 깎여
예산 삭감을 비상계엄 필요성 근거로 삼아
삭감 예산안 연말까지 협상 여지 있었는데
관가 "예산 많이 깎여도 '계엄' 생각 안 해..
국회와 협상하며 예산 회복 노력이 기본"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3일 저녁 서울역에 설치된 TV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3일 저녁 서울역에 설치된 TV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이른바 대왕고래 예산 삭감을 언급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을 두고 관가를 중심으로 "현실과의 괴리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해마다 국회와 예산으로 줄다리기를 해 온 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이번 예산 삭감 폭이 통상적 수준보다 크긴 하지만 예산안의 본회의 상정이 보류돼 있었던 만큼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협상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판단했다. 비상계엄으로 나아갈 만큼 '국가비상사태'라 보기엔 어렵다는 것이다.




예산 삭감이 비상계엄으로 이어지는 '尹의 사고 흐름'

윤석열 대통령이 6월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동해에 막대한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이 있다는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6월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동해에 막대한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이 있다는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윤 대통령은 3일 긴급 브리핑에서 "민주당은 내년도 예산에서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 등 4조1,000억 원을 삭감했다"며 "이러한 예산 폭거는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가 재정을 농락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서 "민주당은 입법 독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한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예산 삭감→입법 독재→자유민주주의 전복→비상계엄 필요'의 사고 흐름을 드러낸 것이다.

여러 예산 삭감 사례 중 대표적으로 언급된 동해 가스전 개발 사업은 윤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발표를 했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부가 제출한 예산의 98%가 깎였다. 여러 예산안 중에서 삭감 폭은 이 사업이 가장 컸다.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예상치 못한 '전액 삭감' 수준의 예산안이 나오자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박성택 산업부 1차관은 3일 비상계엄 발표 몇 시간 전에 기자 간담회를 열고 예산 복구 필요성을 강조하며 "용산 대통령실에서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바라보고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설명했다.


'예산 정국' 두고 尹-부처 사이 '태도의 괴리'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새벽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발표하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다. YTN 캡처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새벽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발표하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다. YTN 캡처


문제는 산업부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몇 시간 뒤에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버렸다는 점이다. 산업부 입장에서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조치가 비상계엄이 돼버린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한 산업부 관계자는 "박성택 1차관이 언급한 '조치'는 통상 정부가 예산 정국 때 국회를 상대로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정도의 수사였다"며 "그 어떤 공무원도 예산이 삭감된다고 비상계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과 일선 부처 사이에 예산 정국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또 다른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삭감을 정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거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요구하는 예산안은 분명 필요한 만큼 요청하지만 국회에서 무조건 통과시켜줘야 하는 건 아니다"라며 "국회와 예산 줄다리기할 때는 이런 마음가짐이 기본이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회와의 간극은 훨씬 심해..."민주당과 협상 여지 있는데"

박정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3차 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가결 후 산회를 선포하고 있다. 뉴시스

박정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3차 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가결 후 산회를 선포하고 있다. 뉴시스


윤 대통령과 국회와의 간극은 훨씬 심하다는 게 정치권과 관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회 관계자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와 같은 단일 사업 진행에 직접 영향을 주는 예산을 대규모로 깎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결국 의원들의 지역 예산 배정 등을 두고 협상하면서 예산을 회복해 주는 게 통상적 예산 정국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2일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며 삭감된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고 협상 여지를 만든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여야 간 협상 과정을 기다리지 않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정부 내에선 "윤 대통령의 급발진"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예산 정국에 대한 무지로 인한 과격한 의사결정이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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