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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불면 '설렁탕' 찾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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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상관없이 먹을 순 있지만 설렁탕은 그래도 겨울이 제철이다. 뽀얀 고기국물에 밥을 풍덩 말아 면과 함께 후루룩 먹는다. 여기에 달고 시원한 깍두기 한 점을 아삭하게 씹어 먹으면 차가운 바람을 이겨낼 뜨끈한 뱃심이 올라온다.
이 맘 때면 외식 메뉴로 설렁탕을 비롯한 국밥 종류가 자주 거론된다. 추운 계절에 뜨끈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렁탕이 과거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대중음식이었던 점도 한 몫을 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설렁탕이 도시 빈민들의 단골 외식으로 자리 매김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숨겨져 있다.
첫째, 우리 민족은 국에 밥을 말아먹는 탕반(湯飯)문화를 기본으로 한다. 아무리 반찬을 함께 먹더라도 밥만 먹으면 목이 메이니 국물을 필요로 했다. 밥을 매끄럽게 먹을 수 있으며 동시에 밥맛도 좋아지니 탕은 밥그릇 옆자리를 반드시 사수하는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보온시설이 없던 과거에는 차갑게 식은 밥을 뜨거운 탕에 넣으면 따듯하게 데워졌다. 토렴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탕반 문화를 통해 맛을 넘어 효율성까지 추구했다.
둘째, 설렁탕은 단백질과 지방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던 영양식이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했으니 이처럼 고마운 외식 메뉴가 없었다. 과거에 백정이 소를 도축하면 귀한 정육은 궁궐이나 지방관아에 먼저 납품했다. 그러다보니 남은 부산물은 뼈, 내장, 꼬리, 머리 등이었다. 허드레 고기라고 불리는 이 부위들은 당시 냉장시설이 없었을 테니 솥에 넣고 푹 끓여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어서 정식 명칭은 없었지만,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식으로 고기 국물을 섭취해왔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비싼 살코기를 넣고 끓인 곰탕은 반가 음식으로, 사골처럼 뼈를 넣고 끓인 설렁탕은 도시 빈민을 위한 저렴한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영양이 풍부한 설렁탕은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었다. 1940년대에 유흥향락가 일대에 자숙금령이 내려졌다. 종로, 남대문의 설렁탕집은 밤 11시까지 영업시간을 제한했다. 밤늦게 이 지역의 설렁탕집을 찾는 손님은 주로 술 취한 남자와 여급들이었기 때문에 풍기를 어지럽히는 원인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예외로 동대문과 서대문 밖의 설렁탕집은 심야 영업을 허가했다. 근처에서 밤중 또는 새벽 일찍부터 일하는 노동자들이 요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렁탕은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당시 국민들이 설렁탕을 즐겨 찾았던 증거는 또 있다.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설렁탕을 13전으로 내리기로 했으나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10전으로 내릴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나온다. 행정관청에서 설렁탕 값을 지도하는 지경에 이른 것. 설렁탕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자 업자들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수 없는 공공재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설렁탕은 '국민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반들은 설렁탕을 잘 먹지 않았다. 상민과 나란히 먹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 정 먹고 싶으면 배달을 시켜 아랫사람이 설렁탕을 사오게 했다.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193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대표 배달음식 중 하나가 설렁탕이었다. '뽀이'라 불리는 배달꾼은 설렁탕 그릇을 목판에 담아 어깨에 메고 자전거를 타며 거리를 누볐다. 당시 관공서와 경찰서가 설렁탕의 단골 주문처였다. 특히 종로경찰서에는 배달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경찰들은 물론이고 피의자들도 일단 설렁탕을 한 그릇 비운 뒤 취조를 받았다. 신분의 고하 없이 배고픈 이는 설렁탕 한 그릇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쇠고기 수요 증가, 탕반이나 토렴 등 한국 고유의 식문화, 서울 인구 급증 등 여러 사회 배경이 맞물려 설렁탕은 18세기 이후로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아왔다. 그래서일까, 험난한 역사 속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설렁탕 한 그릇에는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왠지 마음까지 차갑게 시려오는 이 계절 자연스럽게 설렁탕이 떠오르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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