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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힙이 한강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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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주변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종이책을 읽는 이가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다. 어제 출근길엔 이전엔 상상도 못 했을 장면을 접했다.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성이 양장본 책을 읽는 걸 본 뒤 눈을 돌렸더니 옆자리 승객 두 명이 나란히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책장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을 법한 누렇게 바랜 책에 몰두한 MZ 여성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 ‘한강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조어가 유행한 건 그 이전부터다. 낡은 것으로 여겨져 온 책(텍스트)이 새로움과 개성을 추구하는 MZ세대 문화(힙)로 받아들여진 건 아이러니하다. 철골과 콘크리트가 노출된 공장식 카페를 선호하고, 빈티지숍을 즐겨 찾는 것과 무관치 않겠다 싶다. 아날로그 아이템(책)을 퍼나르는 공간도 디지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북톡 등의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넘친다. 읽고 있는 책을 공유하고, ‘완독’ 인증샷을 남긴다.
□ 셀럽(유명인)의 영향도 컸다. 3년 전 방탄소년단 RM이 공연장에서 자장면을 먹는 캡처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옆에 놓인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젊은 나이에 숨진 국내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요절’(조용훈)은 입소문을 타며 절판 10년 만에 재출간됐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강용수)는 “사람들은 마흔에 읽지만 저는 스무 살에 읽고 싶었다”는 걸그룹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언급 이후 MZ들에게까지 각광을 받았고, 배우 한소희가 인터뷰에서 소개한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는 800쪽 ‘벽돌책’임에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 가벼운 유행에 그치지 않겠느냐고 많이들 우려한다. SNS 인증이 식상해지면 금세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파인 다이닝’ 열풍도, 골프 인기도 그렇게 시들해지긴 했다. 그래도 맛을 들이면 중독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책은 많은 비용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텍스트힙에 자기계발서류가 아니라 한강의 순수문학이 결합된 건 고무적이다. MZ세대가 그 ‘깊이’를 평범하지 않은 멋짐으로 여길 때 책의 부활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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