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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바람, 햇빛, 돌... 자연 끌어들여 완성한 건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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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종의 오늘의 건축'은 치과의사 출신의 건축가인 정태종(58)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가 국내외 현대 건축물을 찾아 각 건축의 지향점과 특징을 비교하고 관련된 이슈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4주에 1번씩 연재합니다.
빛이 있어 그림자와 함께 세계를 만들고, 바람이 불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연이 있어 인공의 건축물과 도시가 숨을 쉬며 그 속에서 내가 매일의 일상을 살아간다. 건축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주변 환경 속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를 만들고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를 공간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분위기에 취하고 마음을 울리는 현상학적 건축물을 찾아가 본다.
건축 현상학이라고 하면 어려운 건축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간에 머물며 몸의 감각을 통해 매 순간 건축 현상학의 개념을 경험하고 있다. 건축 현상학이란 빛, 그림자, 물, 바람 같은 자연 요소를 건축에 구체적으로 이용해 자연을 공간화하거나 주변 환경을 사람의 동선과 연결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주체가 감각을 통해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대상과 세계를 지각한다는 인식론인 현상학을 건축 분야에 접목한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빛의 교회'가 전형적인 건축 현상학의 사례다. 빛의 교회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빛으로 표현한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 조형물을 쓰는 일반적 교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단순한 건축 재료인 콘크리트에 홈을 파고 거기로 빛이 들어오게 만들어 우리가 새로운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 내륙의 도시 청두. 판다와 차로 유명한 도시다. 청두에서 멀지 않은 외곽에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즉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상이라는 어휘가 잘 어울리는 관음각이라는 다원이 있다. 오래전 사찰이었던 찻집은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강가에 자리한다. 건물과 골목길이 경계 없이 활짝 열려 있어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백 년이 훌쩍 넘는 곳이라 밖에서 언뜻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지붕 가까이 위치한 높은 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이 찻물의 수증기와 담배 연기와 섞이면서 찻잔과 사람과 바닥까지 골고루 비춰 몽환적 분위기를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인위적 조명, 즉 전등 하나 없는 어둑한 공간에 새어 들어오는 빛이 흐릿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 어떤 현대건축보다도 더 놀라운 현상학적 공간이다. 빛과 수증기와 연기가 만드는 분위기에 젖어 차를 마시다 보면 찻집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찻집 바닥을 보면 특이한 문양이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신발에 묻히고 들어 온 흙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수천 발걸음의 흙이라는 첸쭈니(千足泥)라고 한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울퉁불퉁한 바닥에 가득한 시간의 문양으로 내려와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감탄만이 나온다. 관음각은 최고급의 차를 매우 저렴하게 즐기면서 유명 건축가의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최고의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곳이다.
서양에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보석이라면 동양은 은은한 빛의 진주를 최고로 친다. 진주를 주력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보석을 만드는 회사 미키모토는 보석을 담고 있는 사옥도 남다르다. 도쿄의 대표적 번화가 긴자에 위치한 미키모토 긴자는 일본 현대 건축가 이토 도요가 설계한 건축물로 외부 형태는 노출 콘크리트로 만든 단순한 박스 형태다. 건축가는 박스에 스폰지처럼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구멍을 뚫고 투명한 유리로 메꿔 건축의 외피를 만들었다. 이 건물에는 내·외부의 기둥이 없다. 대신 불규칙하게 구멍이 뚫린 입면의 벽체가 기둥 역할을 해서 내부는 기둥 없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외부는 자유롭고 다양한 입면을 형성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내부 공간과 외부 입면을 가진 회색 건축물은 마치 콘크리트 나무처럼 서 있다. 건축물이 들어선 긴자 뒷골목의 가로수가 풍성하게 자란 푸르른 나뭇잎을 드러내면서 건축물과 마주 서 있다. 나무와 건축물, 즉 자연과 인공물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로 동화되는 듯하다. 자연과 현대건축의 조화가 상업 건물이 즐비한 도쿄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다.
한국은 땅덩이가 좁은 지리적 한계상 개별 지역만의 뚜렷한 문화적 특성을 만들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제주 지역은 자연 환경 자체만으로도 한국에서 제일 색다른 지역이다. 바다와 바람과 화산석이 많아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고 이국적이라서인지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머물고 싶어 하는 곳이다. 이런 제주에 최근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다. 그중 제주를 사랑한 이타미 준은 자연과 제주의 분위기를 건축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교회, 호텔, 미술관 등 여러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했지만 수풍석 박물관이야말로 제주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제대로 표현해낸 곳이라 할 수 있다. 제주 환경의 특징인 물, 바람, 돌이라는 자연 소재의 특성을 관람자가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공간이다. 제주의 자연과 건축을 경험할 수 있는 단 한 곳을 선택하라면 바로 이곳이다.
강원 원주시 근교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뮤지엄 산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지만, 자연 속에서 남다른 공간을 경험하고 뛰어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더 인기가 있는 듯하다. 이곳의 핵심은 기존 전시공간인 화이트 박스에서 벗어나 자연 속 다양한 전시 공간을 걸으며 예술을 감상하고, 외부 공간에서 자연도 느끼는 데 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명상의 공간도 넣는 등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와 시나리오를 통해 풍부한 공간적,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전시 공간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마치 책 한 권을 읽는 것과 같은 성취감을 준다. 이제 미술관은 예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움직임을 통한 극대화된 현상학적 경험을 안긴다.
건축 현상학은 인간 주체가 어떻게 느끼는지, 감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이는 내가 중심이 되어 자연과 건축물과의 관계를 정의하며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보다는 신체가 매개체가 되어 일상생활에서 경험을 중시하게 된다. 경험의 축적은 하나의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 '장소'로 전환하게 하며, 이러한 장소성은 주체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세계 속 자연의 일부로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건축 현상학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주체와 사회와 세계란 무엇인가,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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