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에서 밀려난 임 전 실장의 돌연한 변심
무리한 '주목 끌기'나 북한과의 교감 가능성
대한민국 혜택받은 정치인으로 제 역할해야
과거 북측과 협상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면 청사 전면에 걸린 붉은색 구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공항을 떠나 40분 거리의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 가장 많이 게시된 구호는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따른다"였다. 빈곤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들판 협동농장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낡은 건물 입구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당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 복종이 강조되었다.
오래전에 낯선 곳에서 보았던 구호가 다시 떠오른 것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뜬금없는 통일부정론 때문이다. 전대협 3기 의장으로서 1989년 임수경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불법 입북시키는 등 통일 지향적 전력은 어느 모로 보나 통일포기론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 휴전선을 무단으로 횡단하는 이벤트를 통해 정전체제와 남한의 방어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이적행위를 저질렀으나 명분은 통일이었다. 그의 변심은 두 가지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현실의 무기력함이 변하게 했을 것이다. 총선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순응하지 못한 대가로 인한 공천 탈락은 정치적 입지를 어렵게 했다. 주류에서 밀려난 그는 갑자기 간판을 바꿔 다는 도박을 감행했다. 좌우지간 그는 기이한 논란의 중심에 섰고,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려운 정치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은 평양 교감론이다. 과거부터 남한 운동권은 평양의 노동당 결정에 무조건 충성했다. 지난해 말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 선언 이후 남한 내 동조세력이 찍소리 안 하고 방침을 따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후 2월 17일 자주통일을 주장해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은 자진 해산했다. 6·15 공동실천남측위 역시 유사한 행태를 보였다. 일본 조총련 간부들도 통일 포기 선언에 황당해했지만 고분고분하게 평양 지침을 따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김정은의 반통일 선언으로 종북·좌파 세력엔 통일이 금기어가 됐다.
북측의 지시에 따라 운동권 인사들이 돌변하는 이유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따른다"라는 충성 서약 때문이다. 그들은 운동권 가입 직전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선배와 조직은 물론 평양의 지침을 확실하게 따랐다. 북의 보스가 보내는 결정문은 그들에게는 바이블이었다. 중요한 계기마다 통일전선부는 팩스 등 다양한 메신저를 통해 남한의 종북 좌파들을 조종했다.
공산당의 의사결정 시스템은 '민주집중제'다. 권력은 상부에 집중되고 하부는 보스의 결정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의 제기는 분파주의로 몰려 출당과 철직(撤織)이 기다린다.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며 개혁적이라고 자부했던 젊은이들이 맹목적으로 움직였던 행태는 확신이었는지 무지였는지 미스터리였다.
통일 포기로 평화를 보장한다는 논리는 궤변이다. 평화로 이어지기보다는 김정은의 핵 사용 명분이 될 수 있다. 민족공조를 지속한다면 핵 선제사용을 할 수 없다는 김정은의 복심을 파악해야 한다. 김정은을 최후까지 수호하는 것은 핵이라는 판단이다. 최근 이어지는 김정은의 핵 위협 발언은 빈말이 아니다. 평양 권력과 디커플링을 하는 것이 임 전 실장에게는 정체성을 상실하는 길이겠지만 언제까지 평양의 통일전선 전술을 서울 제도권에 끌어들여 소모적인 소동을 지속할지 우려스럽다.
임 전 실장이 우리 사회에서 받은 정치적 혜택을 감안할 때 '무조건 평양 따라 하기'는 막을 내려야 한다. 오히려 김정은의 선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야 한다. 그래야 통일 선구자 역할과 앞뒤가 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오락가락 행적은 김씨 일가의 대남 적화 통일에 대한 시기별 추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구호는 영화 제목을 연상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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