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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페이스' 정치는 불가능한가

입력
2024.10.09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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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대 둘러싼 대통령-여당 대표 ‘감정 싸움’
갈등 원인은 김 여사 리스크에 대한 이견
불편한 속내 감추고 대화하는 냉철함 필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1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제76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앞을 지나가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1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제76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앞을 지나가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조는 힘이 약했던 유비가 자신의 식객으로 지낼 때 그의 됨됨이를 눈여겨보고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난세의 영웅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유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 둘러대자 조조는 “영웅은 그 사람들이 아니고, 자네와 나 두사람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유비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고, 때마침 천둥이 치자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벌벌 떨었다. 이 모습을 본 조조는 유비를 그릇이 작은 인물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풀었다. 자신의 재능이나 큰 뜻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계략을 뜻하는 ‘도회지계(韜晦之計)‘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자신을 숨기며 힘을 기른 유비는 훗날 조조와 패권을 다투게 된다.

유비는 말수가 적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좀체 속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포커페이스’의 대명사였다. 이런 사람과 맞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면서 상대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능력까지 가졌다면 맞붙어 이길 가능성이 적다.

지금 우리 정치에 이런 스타일의 지도자는 사라진 것 같다.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각종 매체를 통해 여과없이 노출되고, SNS에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게 일반화된 정치 환경에서 유비 같은 ‘포커페이스’ 리더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심기·감정과 관련한 정보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고 넘친다. 뒷얘기와 소문, 정황으로 심기를 유추하던 수준을 넘어 윤 대통령이 직접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독대를 둘러싼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감정 싸움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을 정도다. 지난달 초 윤 대통령은 여당 일부 최고위원, 수도권 중진 의원과 번개 만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 한 대표가 빠져 ‘패싱 논란’이 일었다. 이후 한 대표가 독대 요청을 하자 대통령실이 “별도 협의할 사안”이라며 거부했고, 이달 초 또다시 윤 대통령은 한 대표를 제외한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를 따로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정작 한 대표를 포함한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 때는 의료대란과 김건희 여사 문제 등 현안 논의가 빠져 ‘빈손 맹탕’이었다는 비판이 나왔고, 한 대표가 다시 독대를 요청했지만 대통령실은 묵묵부답이다.

명색이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인데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한 ‘밀당’이나 '치열한 수싸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기분 나쁘니 만나지 않겠다’는 일차원적 감정 표출만 보인다.

‘속좁아 보이는’ 대통령의 감정 표출은 대부분 김건희 여사 문제와 관련돼 있다. 한동훈 대표와의 갈등도 김 여사 리스크에 대한 이견이 출발점이었다. 가족, 특히 배우자에 대한 비판과 공격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윤 대통령의 과도한 감정적 대응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20%대의 지지율, ‘친윤-친한’ 계파 갈등이 본격화한 여당, 거대 야당의 파상공세 등 정치 상황은 사면초가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대표는 물론이고, 여당 대표와도 ‘만날 이유가 없다’며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다. 취임 초부터 강조한 ‘4대 개혁’은 물론이고, 실타래처럼 꼬인 의정갈등도 해결의 출발점은 대화와 협상이다.

‘김 여사 리스크’의 약점을 안고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윤 대통령에겐 ‘감정을 숨기는 기술’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어차피 마주 앉을 상대는 김 여사 의혹을 집요하게 파고들 텐데, 당장 불편하고 언짢다고 감정을 드러내면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협상 테이블에서 두려운 존재는 걸핏하면 ‘격노’하는 사람이 아니라, 냉정함과 치밀함을 갖춘 ‘포커페이스’다.

한준규 뉴스2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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