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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중동 하늘길 막은 미사일... 이스라엘·이란까지 맞붙은 가자지구 전쟁 1년 현장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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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오전 9시가 좋겠네요. 그때 오세요."
이스라엘 남부 키부츠(공동 소유 기반 생활 공동체) 비에리(Be'eri)에서 연락이 왔다. 비에리는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침투해 주민 10명 중 1명이 죽거나 납치된 비극의 장소. 하마스 기습 이후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지만 전쟁 1년이 지나도 여전한 고통을 한국일보에 잠시나마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 그곳에 도착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지난달 중순부터 친(親)이란 '저항의 축'(반미·반이스라엘 무장 세력) 핵심인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에 대한 공세를 최고 수위로 올리자, 이란이 1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 약 180기를 발사했고, 이스라엘이 재차 보복을 예고하며 중동 하늘길이 막힌 탓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기습 침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북부 전선 헤즈볼라 공격, 이란과의 미사일 공방이 이어진 지난 1년. 전쟁은 끝을 향하기는커녕 중동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전쟁 1년 이스라엘 현지 취재를 위해 지난달 24일 폴란드 항공사 LOT가 운행하는 텔아비브행(벤구리온 공항) 항공편을 예매했다. 유럽특파원이 체류 중인 독일 베를린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텔아비브에 3일 오후 6시 도착하는 항공편이었다. 그러나 헤즈볼라 통신장비 연쇄 폭발(지난달 17, 18일)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세가 격화하면서 항공편이 결항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결항 확률이 적다는 이스라엘 국적기 엘알 항공기 이용으로 계획을 바꿨다.
항공편만 변경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지난달 30일 '이스라엘 항공편이 취소됐다'는 안내가 도착했다. 이날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서 헤즈볼라를 대상으로 지상전을 개시한 날이었다. 사흘 전엔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이스라엘 표적 공습으로 사망했다.
계획을 틀어야 했다. 베를린보다 텔아비브행 티켓 구하기가 쉬운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 뒤 체코 프라하→텔아비브 경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2일 오후 1시 15분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운항이 예정돼 있던 텔아비브행 항공편은 파리에 도착하니 취소돼 있었다. 1일 이란이 이스라엘에 탄도미사일을 퍼붓고 이스라엘이 복수를 경고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자 비행구역이 잇따라 폐쇄되고 이 지역 항공편 역시 운항을 대부분 멈췄던 것이다.
파리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텔아비브행 항공편을 구할 방법은 희박했다. 이미 다수 항공편이 취소됐고, 엘알 등 이스라엘 항공사가 운영하는 극소수의 항공편은 매진이었다. 유대교 달력으로 새해 명절인 로시 하샤나(10월 2일 일몰~10월 4일 일몰)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이스라엘 국민들 역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전문가 조언을 받아 지중해 키프로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텔아비브행 항공편이 가장 많이 출발하는 곳이라 표를 구할 확률이 높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은 독일(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갔다가 키프로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시 프랑스에서 독일로 향하는 동안 4일 오전 출발하는 키프로스항공사의 텔아비브행 티켓도 한 장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프로스 도착과 동시에 휴대폰에는 다시 결항 안내가 날아들었다. 이즈음 '이스라엘이 이란의 석유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 같은 구체적 보복 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로운 티켓을 발견한 건 3일 밤 11시. 7시간 뒤인 4일 오전 6시 이스라엘 항공사 아르키아가 운항하는 항공편이었다. '확정된 비행은 아니다'라는 안내가 따라붙었지만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출발이 불확실한 표를 예매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공항으로 향했다.
4일 오전 3시 30분쯤 도착한 키프로스 라르나카공항은 텔아비브행 비행기 탑승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출발 2시간 전에야 항공편은 '확정'으로 상태가 바뀌었고, 이내 체크인이 시작됐다. 탑승을 대기하던 이들은 박수를 쏟아냈다.
4번의 비행편 취소·결항 끝에 4일 아침 도착한 이스라엘 중심 도시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은 썰렁했다. 전쟁 중인 이스라엘을 굳이 찾는 이도 없거니와, 현재는 극히 일부 항공편만 이스라엘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이들을 맞은 건 지난해 10월 하마스에 납치된 사람들이 담긴 사진 행렬이었다. '그들(인질들)을 집으로 데려오라'(Bring them home now)는 문구도 곳곳에 보였다.
공항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인은 "공습 경보 애플리케이션은 깔았느냐"고 물었다. 입국 사흘 전 있었던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염두에 둔 조언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이방인'이 어색하고 걱정된 듯했다. 공항 내 서점 직원은 유심을 구매한 뒤 떠나는 기자에게 "이스라엘을 즐기라"고 인사했다가 멋쩍다는 듯 "'안전하라'는 말이 낫겠다"고 말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비에리 키부츠로 향해야 했지만 마구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텔아비브에서 가자지구 인근으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 하마스에 희생된 이를 추모하는 의미로 달아둔 노란 깃발이 끊임없이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처럼 인질 사진도 곳곳에 붙어 있었고, 작은 추모 공간도 이따금 보였다. 1년 전 하마스 침공 당일 이스라엘에서 약 1,200명이 사망했고, 251명이 인질로 가자지구에 끌려갔다.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1시간쯤 달려 도착한 비에리 입구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마스 기습 이후 외부인에 대한 주민들의 공포와 불안이 커진 데다 비에리를 포함한 남부 곳곳이 특별 군사 지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가자지구와 약 5㎞ 떨어져 있는 비에리에는 지난해 10월 7일 오전 6시 45분부터 하마스 및 테러리스트 340명가량이 침투했다. 주민 약 1,000명 중 101명이 하마스 손에 숨졌고, 인질로 붙잡혀간 30명 중 11명은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 주민과 함께 둘러본 비에리 내부는 고요했다. 지난해 공격 이후 생존자 상당수가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40㎞ 떨어진 다른 키부츠의 조립식 건물 등에 사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곳에 누가 살았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마스에 희생된 이들이 살던 집 입구에 희생자 사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흔적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마스에 의해 비참하게 희생된 이들의 사연은 생존자에 의해 증언됐다.
"가자지구 주민들을 이스라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던 평화운동가 비비안 실버(74)가 살해된 곳이 여깁니다." '팔레스타인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던 이스라엘계 캐나다인 실버의 죽음은 비에리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끌어올렸다.
생존자 니르 샤니(47)는 하마스에 의해 희생됐다는 한 노부부의 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집 안에 안전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사일 등을 피하고자 두꺼운 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공간이죠. 노부부는 그런 안전실에 숨어 있다 죽었어요. 안전하려고 만든 곳에서 살해된 겁니다. 아이러니하죠."
하마스 침공 당일 비에리 주민들이 모여있는 단체 대화방에는 '살려달라' '도와달라' 등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러나 총을 쏴대고 불을 지르는 테러리스트가 있는 바깥으로 누구도 나갈 수 없었기에 서로는 서로를 도울 수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하마스 공격이 이어진 시간은 10시간 안팎이었으나 비에리에서는 48시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끔찍한 이틀이었다.
비에리에서 약 5㎞ 거리에 있는 최대 비극 현장 레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마스 침공 당시 레임 주차장에서 '노바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었던 터라 희생자가 많았다. 레임에서는 383명이 죽고, 44명이 납치됐다. 비에리와 레임은 232번 도로가 잇고 있다. 하마스가 침공 당시 이용했던 '비극의 도로'다. 하마스 공격 당시 도망치다 도로에서 전소된 차량 약 1,000대는 타쿠마 키부츠에 쌓여 있다.
축제 현장이었던 레임 주차장은 거대한 무덤이 돼 있었다. 사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빽빽하게 들어섰기 때문이다. 바닥에 꽂힌 기다란 막대기 위에 걸린 사진 속 인물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막대기 주변으로는 흰색 돌멩이가 잔뜩 놓여 있었다. 이곳을 찾은 한 이스라엘인은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가볍게 키스한 돌멩이를 놓아두는 게 이스라엘 문화"라고 말했다. 이곳은 동시에 인질을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자지구와 가장 가까운 키부츠 중 하나인 니르 오즈를 찾으니 드넓은 평지 너머로 가자지구가 보였다. 이곳 주민 이릿 라하브(58)는 "어렸을 때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교류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 남부의 피해는 가자지구와의 거리와 반비례했다. 니르 오즈는 가자지구 경계선에서 겨우 1.6㎞ 떨어져 있었다. 150명의 하마스 테러리스트는 세 방향에서 포위하는 방식으로 니르 오즈를 덮쳤고, 415명이 거주하던 마을에서 40명이 사망하고 71명이 납치됐다. 200개가량의 건물 중 하마스 손을 타지 않은 건 고작 6채였다.
이곳에도 희생자들의 삶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마스 공격 전날 밤 별을 보면서 잠들겠다며 아빠와 함께 집 앞에 텐트를 쳤던 어린아이의 흔적이 흙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방 안에 숨어 있다 하마스에 희생된 이들의 핏자국은 아직 닦이지 못한 채 바닥에 그대로 눌러 붙어 있었다. 라하브는 "키부츠 재건 이야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납치된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겨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 진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니르 오즈를 둘러보는 동안 인근 가자지구에서 폭발음이 계속 들려왔다. '펑' 하는 소리가 몇 초 간격으로 세 번 연달아 울렸고, 뿌연 먼지도 보였다. 전쟁 1년을 맞는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란과 저항의 축 전반으로 확전을 모색하는 사이 잊힌 가자지구에서는 여전히 장벽에 갇힌 채 사람이 죽고 있었다.
5일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가자지구에서 숨진 사람은 4만1,825명. 어린이 사망자만 1만6,000명이 넘는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약 220만 명)의 약 2% 정도가 1년 새 희생된 것이다.
비에리 방문 때는 이스라엘방위군(IDF) 소속으로 추정되는 무인기(드론)가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레임으로 향하는 도로에선 군용기 굉음이 계속 들려왔다.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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