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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당은 고통받는 이들의 나침판… 신 무서운 줄 알면 나쁜 짓 못해"

입력
2024.10.22 04:00
수정
2024.10.22 19:05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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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믿음 : 무속 대해부>
만신 3인이 말하는 바람직한 무당의 길
정순덕, 민주화운동 희생 진혼굿 '민중무당'
"굿의 본질은 인간의 행복, 평생 수행해야"
국악인 김규리 "미래 고민도 무당의 윤리"
서울새남굿 전수자 김연옥 "전통 굿 계승"

편집자주

하늘과 땅을 잇는 원초적 존재, 무당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범죄의 온상이 될 때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한국일보는 석 달간 전국의 점집과 기도터를 돌아다니며 우리 곁에 있는 무속의 두 얼굴을 조명했다. 전국 어디에나 있지만, 공식적으론 어디에도 없는 무속의 현주소도 파헤쳤다.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무속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모색했다.

지난달 7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기도터에 있는 정화수 한 그릇. 하상윤 기자

지난달 7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기도터에 있는 정화수 한 그릇. 하상윤 기자

무속은 전통신앙으로 여겨지기보다 미신으로 치부돼왔다. 무당이 범죄에 연루돼 구설에 오르는 등 부정적 인식도 강하다. 하지만 여전히 무속인을 찾아 고민과 고통을 해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른 직업인과 마찬가지로 무속인에게도 소명 의식과 성실함, 도덕성이 요구되는 이유다.

한국일보는 만신(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 정순덕(57), 김규리(38), 김연옥(53)씨를 만나 바람직한 '무당의 길'에 대해 물었다. 정순덕씨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이들의 진혼굿(넋을 달래는 굿)을 이끈 '민중무당'으로 활동했고,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강연을 부탁할 정도로 기성 종교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김규리·김연옥씨는 한국무속학회장을 지낸 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장이 모범적인 무속인으로 추천했다.

①애기무당에서 민중무당 거쳐 큰무당으로

"무당에게 가장 무서운 건 신령님의 눈입니다. 정말 엄격합니다. 두 번째는 신도들 눈빛이고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위해 매일 기도합니다."

정순덕 만신이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정순덕 만신이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1967년 충남 서산 출생인 정순덕씨는 여덟 살 때 신내림을 받았다. 15세 때 '나라 만신' 김금화(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선생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무당 학습을 받았다. 김금화의 수제자가 된다는 건 무녀로서 탄탄대로를 걷는 걸 의미했다. 정씨는 그러나 20세에 '민중무당'의 길을 택했다.

정씨는 1987년 이한열 열사 진혼굿, 1988년 박종철 열사 1주기 진혼굿을 통해 두 사람의 넋을 위로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저승길도 닦았다. 전국을 다니며 민주화운동 열사들의 진혼굿을 열었다. 서슬 퍼런 총칼보다 억울하게 떠난 영혼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정씨는 32세 때 제주 4·3 희생자 진혼굿을 마지막으로 민중무당의 삶을 내려놨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단골을 돌보라는 신령님 뜻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정순덕 만신이 지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정순덕 만신이 지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풍파도 많았다. 절대적 스승인 김금화와의 결별은 인간 정순덕을 흔들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민중무당으로 활동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씨는 여러 진혼굿에서 "갈아보세, 갈아보세, 5공청산 갈아보세" 같은 금기어를 내뱉었고, 공안경찰을 피해 강원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20대 무녀에게 이데올로기가 중요할 리 없기에 그는 혼이 실리는 대로 말했다. 뒤에서 정씨를 험담하는 동료들이 생겨났고, 결국 여러 오해가 쌓이면서 그는 23세에 홀로 섰다.

"신어머니(김금화)는 최고 무당이셨고 함께 다니면 대우를 받았지만,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무당은 술집 여자만도 못한 천한 직업이란 걸 깨달았지요."

정순덕 만신의 스승 김금화. 무용가이자 무당인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예능보유자다. 2019년 2월 23일 사망했다. 연합뉴스

정순덕 만신의 스승 김금화. 무용가이자 무당인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예능보유자다. 2019년 2월 23일 사망했다. 연합뉴스

정씨는 생을 끝내려고도 했지만, 자신을 걱정하며 새까맣게 변해버린 가족 얼굴을 보자 '이건 할 짓이 아니구나' 느꼈다. 정씨는 신령님께 무릎 꿇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 최선을 다해 무녀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올바른 무당이라면 고통받는 이들의 나침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정씨의 생각이다. “무당은 하늘에서 선택받았기에,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을 해결하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정순덕 만신이 1996년 경기 고양시 금정굴 아래에서 양민학살 피해자들의 진혼굿을 주관하는 모습. 6·25 전쟁 때인 1950년 금정굴에서 경찰에 의해 민간인 100여 명이 학살됐다. 정순덕씨 제공

정순덕 만신이 1996년 경기 고양시 금정굴 아래에서 양민학살 피해자들의 진혼굿을 주관하는 모습. 6·25 전쟁 때인 1950년 금정굴에서 경찰에 의해 민간인 100여 명이 학살됐다. 정순덕씨 제공

그러면서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행이 충분하면 신이 무서워서라도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신은 무정(無情)하고 배려와 용서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최근 돈 때문에 무분별하게 신내림을 내리는 풍토도 걱정했다. "신도를 불리면 큰돈을 벌 수 있기에 신내림받은 무당들이 많아졌어요. 이들이 가짜 무당은 아니지만, 수행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기도만 꼬박 3년을 해야 신령님이 옵니다. 신내림은 그저 입문일 뿐입니다. 일주일 기도했다고 그분이 오나요? 절대 안 됩니다."

정순덕 만신이 지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합장하고 있는 모습. 하상윤 기자

정순덕 만신이 지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신당에서 합장하고 있는 모습. 하상윤 기자

그는 미디어에 소개되는 무속 콘텐츠가 '귀신 퇴치'나 '심령주의'(오컬트)에 쏠려있는 걸 안타까워했다. 전통신앙으로서 굿의 본질은 인간의 행복이고 감동인데, 이 부분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무속을 떠올릴 때 감동과 행복이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게 정씨의 소망이다.

"진혼굿을 할 때 무녀는 혼백을 실어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이별을 합니다. 산 사람은 남은 삶을 살아낼 힘이 생기고 망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는 것이지요. 이런 아름다움은 굿에만 있습니다."

②"더불어 살아야 합니다"…국악인, 만신 되다

김규리씨는 무당이 되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원인 모를 두통이 찾아오고 자신도 모르게 공수(신의 말을 전하는 것)를 하는 등 무병(巫病)에 시달렸지만, 김씨는 '운명'을 거부했다. 김씨 부모도 지역에서 이름난 부잣집 딸이 무당이 된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무당 이미지가 친숙해졌다지만, 무당은 무당이었다.

김규리 만신이 지난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서울 천신굿’을 선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김규리 만신이 지난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서울 천신굿’을 선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김씨는 대신 국악에 몰입했다. 무당으로 풀어야 할 신명을 국악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어렸을 적 유명 사물놀이패와 인연을 쌓은 게 시작이었다. 타악(꽹과리) 전공으로 중학교 3학년 땐 국회의장상, 고교 3학년 때 대통령상을 받았다.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진학해 전문사(석사)를 땄고, 국가무형문화재인 동해안별신굿도 전수받았다.

김규리 만신이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서울 천신굿’을 선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김규리 만신이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서울 천신굿’을 선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문제는 세습무(무업을 승계한 무당)로서 굿을 연기해야 하는데, 자꾸 '진짜 신'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신이 들어온 게 들통날까 봐 굿 중간에 무대에서 내려온 적도 있었다. 결혼 후 아이에게 청각장애가 발견되자 김씨는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018년 신내림을 받은 뒤 신기하게도 아이의 장애 증상이 점차 나아졌다. 그래서 아픈 아이를 둔 부모들이 김씨를 자주 찾아온다. 내 아이의 병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김씨는 인간적인 무당이 되고 싶다고 했다.

"무당의 윤리가 뭐냐고요? 보통 사람들과 똑같죠. 사회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지요. 무당에겐 미래가 보이잖아요. 기후위기가 심각하고 자연은 점점 아파하기에 쓰레기 하나라도 더 줍고 물도 절약해야 해요. 우리 아이들이 30~40년 뒤에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합니다."

김규리 만신이 지난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오른손엔 부채, 왼손엔 방울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김규리 만신이 지난 8월 2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오른손엔 부채, 왼손엔 방울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한복집 대표에서 하남시 대표 무당으로

김연옥씨는 11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무병 증세가 나타났다. 결혼 후 우울증이 심해졌고, 무릎 통증과 아들의 질병까지 겹치면서 결국 무당의 길에 들어섰다. 그도 명함 못 주는 직업이 싫어서 처음엔 무당이 되길 완강히 거부했다. 다른 종교도 믿어봤고, 운명을 피하려고 한복집도 운영했지만, 손님들에게 점을 봐주는 모습만 확인했다.

무당이 되자 온전한 삶이 없어졌다. 손님이 찾아오면 점을 보고, 그렇지 않을 땐 기도하면서 굿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가족과는 외식 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인 서울새남굿 공부에 특히 매진했다. 굿 상차림은 물론이고 사소한 춤동작과 장구 장단까지 하나하나 배우고 익혔다. 그는 무교단체 경천신명회의 이성재 회장(서울새남굿보존회 회장)을 신아버지(신내림 굿을 해준 스승 무당)로 두고 있으며, 서울새남굿 제104호 전수자다.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며 작두 탈 준비를 하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며 작두 탈 준비를 하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며 작두를 타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지난 8월 23일 충남 논산시 계룡산연화당에서 김연옥 만신이 신도의 복을 비는 재수굿(서울 천신굿)을 하며 작두를 타고 있다. 논산=정다빈 기자

양종승 관장은 김씨를 두고 '굿에 진심인 무녀'로 평가했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관련 무형유산 계승자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김씨가 자발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산성 도당굿(공동체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 보존회를 설립, 하남시를 대표해 도당굿을 주재하고 있다. 2019년 6월과 2022년 11월에 이어 이달 29일 세 번째 남한산성 도당대제를 열 계획이다. 김씨가 자기 돈을 써가면서 도당굿을 주재하는 이유는 뭘까.

"전통을 계승하는 무당이 많이 줄었잖아요. 사라져가는 우리 굿의 맥을 잇고 싶어요. 무당들이 돈만 쫓는다고 욕 많이 먹지 않습니까. 그런 인식도 바꾸고 싶어요."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 이성원 기자
취재 : 손영하·이서현 기자, 이지수·한채연 인턴기자
사진 : 하상윤·정다빈 기자
영상 : 김용식·박고은·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전세희 모션그래퍼, 이란희·김가현 인턴PD


계룡산= 이성원 기자
손영하 기자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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