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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여고생 살해범도 "술 마셔 기억 안 나"... '심신미약' 아무 때나 안 통한다

입력
2024.09.30 04:30
수정
2024.09.30 07:2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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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년 주요 판결문 분석, 심신미약 인정 '0'
사물변별·의사결정 능력이 없거나 미약해야
"음주 감형 오래전 얘기… 법원 판결 엄격해"

순천 도심에서 길을 가던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A씨가 28일 오전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고 법원을 나서며 심경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순천 도심에서 길을 가던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A씨가 28일 오전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고 법원을 나서며 심경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전남 순천시에서 여고생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남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주장해 공분이 일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를 길거리에서 공격한 잔혹한 범죄자에게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 감형'이 이뤄지는 것 아니냔 우려가 벌써 나온다. 그러나 앞으로 수사 과정을 지켜봐야겠지만 '심신미약'이 아무 때나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법조계 분석이다.

2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살인 혐의를 받는 박모(30)씨는 전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며 "증거는 다 나왔기 때문에 (범행을) 부인하지 않겠다"면서도 "(사건 당시) 소주를 네 병 정도 마셔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앞서 박씨는 26일 0시 44분쯤 순천시 조례동 길거리에서 B(17)양을 살해하고 달아났다가 붙잡혔다.

조두순 등 주취감형 논란에 엄격 반영 추세

형법은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인 경우 그 행위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사물변별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아예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을 경우도 포함된다. 2008년 초등학교 1학년을 성폭행하고도 '주취 감경'이 반영돼 징역 12년형을 받은 조두순이 대표적이다. 순천 사건의 박씨도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던 점을 들어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법원의 심신미약 인정 기준이 최근 엄격해졌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일보가 '음주' '심신미약'을 키워드로 지난해와 올해 '살인죄'가 확정된 주요 판결문 25건을 살펴본 결과, 심신미약이 인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지인 집에서 술을 마시다 옆집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 살해한 A씨는 심신미약을 내세웠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 제7형사부는 지난해 10월 20일 "'블랙아웃(과음으로 인한 기억 상실) 증상으로 범행 당시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며 징역 19년형을 선고했다.

술에 취한 채 아내를 둔기로 살해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서울남부지법 제13형사부는 지난해 7월 18일 "피고인이 안방문을 열쇠로 열고 망치를 이용해 피해자를 살해했고, 다시 망치를 베란다 수납장 부근에 가져다놓는 등 사물변별능력이 충분히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범행 직후 배우자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내용을 이해하고 윤리적 의미를 판단하는 의사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술을 마셔서 범행의 경위가 기억이 안 난다"면서도 자신이 폭행당한 과정은 상세히 진술한 피고인이 심신미약을 주장했지만 기각된 사례도 있었다.

형사 사건을 주로 맡아 온 법무법인 청의 곽준호 변호사는 "대중들은 보통 만취 후 범행은 감형해준다고 생각하는데 법원 판단은 굉장히 엄격하다"며 "(순천 사건도) 흉기를 준비했고, 범행 이후 도망친 점 등을 비춰볼 때 계획 범죄 정황이 있어 심신미약을 인정받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취 범죄,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주취 범죄를 감형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셔 위험성이 되레 크다는 점 등을 고려해 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음주 범죄 시 각 죄에서 정한 형의 2배까지 가중처벌하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지난해 1월 제출한 최춘식 국민의힘 의원은 "자발적으로 책임 능력이 없도록 만든 당사자의 사전적 고의 또는 과실을 형벌 대상으로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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