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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은 직장인 '바디캠' 시대

입력
2024.09.25 16:00
수정
2024.09.26 08:2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8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주재한 가운데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다고 조선중앙TV가 19일 보도했다. 회의에 참석한 군 간부들이 김정은 발언을 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주재한 가운데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다고 조선중앙TV가 19일 보도했다. 회의에 참석한 군 간부들이 김정은 발언을 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이 등장하는 북한의 영상물을 볼 때마다 그곳의 고위급 간부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척 한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 허연 간부들이 김정은 한마디 한마디를 수첩에 적느라 여념이 없다. 김정은의 호명을 받은 인물은 벌떡 일어나 경직된 상태에서도 깨알 메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돌이켜보면 남한에서도 10년 전까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사의 지시를 정확히 이행하려면, 우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 익숙했던 풍경은 MZ세대가 등장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빠르고 유연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기업은 물론이고, 조직문화가 보수적인 중앙부처 공무원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부 세종청사 한 국장급 간부는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업무관련 회의에서 주요 사항을 메모하지 않는다. 모든 내용을 녹음할 뿐”이라고 말했다. 녹음한 걸 어떻게 정리하느냐고 되물었더니, “별도 앱으로 처리하면 녹음이 깔끔하게 문서로 정리된다”고 덧붙였다.

□ 주요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녹취에 관대하다. 한국은 상대방 동의 없이도 통화 녹음이 허용되지만, 미국에서는 불법이다. 50개 주 가운데 13곳에서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을 금지한다. 허용하는 주에서도 명시적 동의를 구하게 하거나, 용도를 제한하는 등 세부 규정이 까다롭다. 한국 출시 삼성 스마트폰에는 녹취 기능이 자동 탑재되지만, 미국 수출용에는 해당 기능이 삭제된다. 애플이 그동안 내수 및 수출용 아이폰에 통화 녹음 기능을 모두 제공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 녹취 확산은 직장 인간관계도 뒤집어 놓고 있다. 노동 관련 소송에서 근로자가 제출하는 핵심 증거가 상사 몰래 이뤄진 녹음이 된 지 오래다. 상사의 갑질이나 성희롱 등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다지만, 악의적 의도가 엿보이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몰래 녹취를 규제하려던 입법 시도가 2년 전 무산된 뒤에는 40, 50대 관리직 커뮤니티에선 ‘부하와 대화할 때는 모든 게 녹음된다고 생각하라’는 팁이 유행하고 있다. 진솔한 대화보다 몰래 녹음이 갈등 해결법으로 자리 잡으면서, 차량 블랙박스처럼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바디캠' 차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닐까.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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