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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에 침묵한 카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행운들

입력
2024.09.25 04:30
25면

편집자주

트럼프와 해리스의 ‘건곤일척’ 대결의 흐름을 미국 내부의 고유한 시각과 키워드로 점검한다.

<5>100세 대통령의 꿈

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로 나선 제럴드 포드(오른쪽) 당시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로 나선 제럴드 포드(오른쪽) 당시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임 중 한국과 악연 많았지만
경쟁후보 실언으로 대선 승리
100세 나이에도 해리스 지원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백악관을 지킨 인물이 다음 주 100세가 된다. 지미 카터다. 역대 최고령 퇴임 대통령이자, 퇴임 후 가장 오래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다. 그는 정치가이자 인도주의자로서 퇴임 이후 생산적 시간을 보냈다. 평화를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한 공로로 2002년 노벨 평화상도 수상했다.

카터는 한국과 관련, 복잡한 유산을 갖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사건이 그의 재임 기간 발생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암살, 12.12 군사반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이다. 카터 행정부는 주요 사건에 대해 침묵했고, 대한민국 현대사는 카터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게다가 한국의 핵무기 개발과 미군 철수를 둘러싸고 한미 간 심각한 논의가 진행됐는데, 이는 40년 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거론한 주제였다. (그렇게 잊혔던) 카터는 긴장완화 방안 논의를 위한 방북(1994년)과 억류된 미국인을 석방하기 위해 재방북(2010년)하면서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임기 중 카터의 가장 큰 업적과 가장 큰 실패 모두 외교 분야에서 나타났다. 그가 마주했던 외교적 문제들은 카터의 후임자 모두에 좌절감을 안겼으며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예컨대 가장 큰 업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살펴보자. 이스라엘과 이집트 관계 정상화를 이뤄냈지만, 카터는 이스라엘에 양보를 이끌어내는 것이 어려웠고 지금 조 바이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대통령은 가자지구에 대한 이슈에서 이스라엘에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다.

가장 큰 실패도 중동에서 벌어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의 국왕이 축출되고 50여 명 미국 외교관과 시민이 444일 동안 인질로 잡히면서 카터 행정부를 마비시켰다. 이란 인질사태로 카터는 유약한 이미지로 각인됐고 재선에 실패했다. 핵무장을 추진하는 이란은 여전히 미국 외교의 최대 눈엣가시다.

카터 집권기와 지금의 국제정세는 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처럼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두 이슈는 미국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과제인데, 과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무기를 제공하여 소련을 물리쳤지만, 지금의 미국과 나토 동맹국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과거와 다른 결과와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한 상태다. 대만 문제도 그렇다. 1978년 카터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시작한 대중 외교 정상화를 마무리했는데, 그로 인해 대만을 버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카터의 뒤를 이은 모든 미국 대통령에게 대만은 어려운 외교 현안으로 남겨졌다.

사실 외교는 조지아 주지사로 대통령직을 추구할 때 카터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해사를 졸업하고 미 해군 잠수함에서 근무했던 그는 부친이 유산으로 물려준 가족 농장을 기반으로 땅콩 재배 사업을 했다. 또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가격 담합에 따른 유가 상승과 에너지 위기 해결에 주력했지만, 그는 실용적이고 종교적이지만 융통성이 없는 인물로 여겨졌다. 이 같은 인물됨은 이스라엘, 이집트, 중국과의 오랜 협상 타결에 도움이 되었는데, 백악관 경호팀이 카터의 암호명을 ‘교회 집사님(Deacon)’으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세계정세는 카터 재임 시절부터 경색됐고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지도적 역할은 줄어든 적이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 유권자들의 국제 문제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낮다. 이는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의 입장이 뭔가에 대해, 미국의 동맹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신경을 쓰는 대선의 해에 더욱 두드러진다. 대선의 해에는 국내 문제가 전통적으로 선거 이슈를 지배해왔다. 9월 10일 카멀라 해리스와 트럼프의 토론에서 전체 12개 질문 중 외교 관련 첫 번째 질문이 7번째 이뤄진 것도 이를 보여준다.

관심도가 낮아 보이지만 카터가 대선 도전에서 승리한 건 1976년 두 번째 토론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의 외교 분야에서의 실언 때문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소련이 동유럽을 지배하는 일은 없으며, 포드 행정부에서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당시 소련의 폴란드 압박에 분노했던 폴란드 이민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포드가 반드시 이겨야 할 오하이오 등지에서 폴란드 이민자 표심이 돌아섰고, 역사가들은 이 실수가 카터가 1976년 선거에서 이긴 이유라고 분석한다.

카터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해리스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미네소타 출신의 진보성향 인물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월터 먼데일과 팀 월즈다. 주요 언론에 따르면 카터는 최근 친지들에게 해리스를 대통령으로 뽑는 투표에 나설 정도로 오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카터의 고향인 조지아는 이번 대선의 주요 격전지이며, 단 한 번의 부통령 토론은 카터의 생일인 10월 1일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카터는 자신의 생일에 벌어지는 토론에서 트럼프의 러닝메이트(JD 밴스)가 48년 전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실수하기를 바랄 가능성이 높다.

폴 공 미국 루거센터 선임연구원
대체텍스트
폴 공미국 루거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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