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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있는 광장' '떠 있는 광장'도 있다...현대 도시 광장의 건축적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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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종의 오늘의 건축'은 치과의사 출신의 건축가인 정태종(58)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가 국내외 현대 건축물을 찾아 각 건축의 지향점과 특징을 비교하고 관련된 이슈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4주에 1번씩 연재합니다.
날씨가 좋은 가을날에는 탁 트인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도심 속 광장이나 공원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거나 혼자 산책을 해보는 것도 좋다. 시민들이 도심 공공 공간에서 편하게 자리 잡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도시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부터 서양 도시의 중심은 광장이었다. 현대 도시에서도 크고 작은 광장이 다양한 잠재적 공간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다. 오래된 역사적 광장부터 새로운 현대판 광장까지, 일상의 공공 공간을 찾아가 본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장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대부분의 도시 광장은 도시 구성원에게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다용도 공간이자 많은 것을 수용하는 포괄적인 장소다.
서양에선 일찍부터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다. 고대 그리스의 시장이자 대중 집회 공간으로서의 '아고라'와 고대 로마 시대의 공공 광장인 '포럼'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서양의 민주주의가 태어났으며 시민은 누구나 광장에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초기 광장의 특징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면서 개방된 대중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그 기능은 도시의 필요에 따라 시장, 정치 집회 공간, 종교 모임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됐다.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라는 광장의 기능은 근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다르게 진화했다. 군사적 행사와 통치자의 힘을 과시하는 행사의 무대가 된 광장에서 전쟁 승리와 전리품 과시, 새로운 무기의 공개, 정치적 적의 처형 등이 이뤄졌다. 시민의 광장이 특정한 인물이나 권력에 대한 숭배의 장소이자, 혁명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후 광장 주변엔 정치·행정 관련 건물이 위치하게 됐다.
현대 도시의 광장은 과거 광장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중에게 다시 돌려주는 공간으로 또 한 번 전환하는 중이다. 열린 대중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사회 발전과 도시 성장에 힘입어 과거보다 더 많은 잠재적 기능을 가지게 됐다.
고대 유럽에선 도시마다 유명한 광장들이 형성됐다. 도심 속 광장의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고 하면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 시에나의 '캄포 광장'이다. 12세기쯤 형성된,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인 캄포 광장은 푸블리코 궁전과 만자 탑 등 도시의 주요한 건축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시에나는 언덕 위에 세운 도시라서 넓은 공간이 많지 않고 도시 대부분은 골목으로 구성돼 있다. 복잡한 중세시대 미로와 같은 회랑 아래로 계단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좁은 골목 사이로 갑자기 커다란 캄포 광장이 나타나는데, 이런 곳에 광장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광장을 하늘에서 보면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망토가 부채꼴처럼 펼쳐진 모습이다. 광장 바닥이 9개로 나뉜 건 광장이 형성된 시기 시에나를 9개의 위원회가 통치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에나 광장은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여행자의 천국이다.
시에나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아레초에 있는 경사진 사각형 모양의 '그란데 광장'도 독특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경이다.
일본 도쿄 서쪽 외곽의 가나가와 공과대학에는 최근 도쿄를 대표할 만한 현대 건축물이 연달아 세워졌다. 일본 건축가 이시가미 준야가 설계한 가나가와 공대 내 공방(워크숍)과 광장(플라자)이다. 공방 건축이 먼저 시작됐고, 바로 옆에 들어선 공대 광장은 13년의 간격을 두고 완공됐다. 공방은 학생이 디자인한 시제품을 만드는 실내 공간이지만, 전체를 유리로 만들어 외부와 연결된 투명한 공간처럼 보인다. 반면 광장은 학생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외부 공간이지만 흰색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처럼 느껴진다. 내부는 외부처럼, 외부는 내부처럼 디자인된 두 건축물은 공간의 모호함과 공간 경계를 새롭게 지각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광장은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땅, 하늘 등 주변 자연의 공존관계를 건축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강철 콘크리트 지붕에 난 사각형 천창들은 햇빛, 비, 바람을 바닥으로 실어 내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한다. 휴식을 취하는 학생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한복판에서 혼자 누워 명상하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광장은 현대 건축이 이룬 새로운 지평이다.
전남 순천에는 '남문터 광장'이 있다. 옛 승주군 청사에 인접해 있는 광장 일대는 쇠퇴한 원도심 지역이다. 남문터 광장은 역사를 복원하면서도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원도심의 도시 조직을 재편하고자 했다. 이소우건축사사무소+스튜디오 MADe가 설계한 광장은 기존의 읍성을 형태적이며 공간적으로 복원하기보다는 자연환경과 도시환경의 역사가 축적된 주변 공간의 맥락과 연결하고자 했다. 지난 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새로운 도시의 층을 과거 원도심 위에 얹은 것이다. 건축적으로 광장은 땅으로부터 수직으로 떠 있는 구조다. 광장 아래로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고 광장 위는 전통 건축의 루(樓)와 같은, 전망이 있는 입체적인 공간이다. 도시 속에 비워 두기만 한 넓은 광장과는 다른 이 새로운 공간은 주변 원도심의 존재성을 부각한다. 광장 가운데 부분을 밑으로 내린 선큰 공간과 열주 공간, 그리고 열린 공간인 보이드를 통해서다.
서울의 대표적 보행로인 서울로 7017의 서쪽 끝자락에는 만리동이 있다. 보행로는 이곳에서 끝나지만, 만리동 광장에서는 또 다른 새로움이 시작된다. 건축사사무소 SoA의 작품인, 만리동 광장의 공공 공간 '윤슬'이다. 물비늘이라고도 하는 윤슬은 물 표면에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한다. 만리동 광장의 윤슬에는 대형 광학렌즈 모양으로 만든 지면 아래로 움푹하게 들어간 공간이 있다. 관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 공간을 경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틈새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윤슬의 내부 공간은 수많은 작은 계단으로 연결돼 노천극장에 온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상부에 설치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슈퍼 미러는 도시의 내부와 외부를 물결처럼 비춘다.
역사 속의 대표적인 광장을 떠올려보면, 도심 건물의 여집합이면서 외부 공간인 경우가 많다. 도시를 분석할 때 '무언가로 차 있거나 비어 있다'는 이분법적인 '피겨 앤드 그라운드 방법론'을 쓰곤 하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도시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도심 속 광장은 주변의 건물들과 더불어 존재와 비움의 관계에서 가치가 생기는데, 대부분의 광장은 단지 물리적으로 비워진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그 가치를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다. 광장은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단순히 비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문화적 요소가 담긴 잠재성으로 가득 찬 비가시적인 공간이다. 또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장소다. 한국의 광장은 근대사에서 정치사회적 중심 공간으로 작용했고, 현대사의 다양한 행위도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미래의 광장에는 과거와는 또 다른 도시와 시민의 역동적 활동이 담길 것이다. 그런 광장이 우리 곁에 계속 있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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