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상옥(1926~2006) 감독은 1962년 벽두에 영화 두 편을 잇달아 선보였다. ‘연산군’이 새해 첫날(당시 표현으로 신정)에, ‘연산군’의 속편인 ‘폭군 연산’은 설날(구정)에 각각 개봉했다. 같은 감독이 연출하고, 출연진이 동일한 영화 두 편이 한 달가량을 사이에 두고 대중과 만난 거다. 흥행업자들이 명절 대목을 놓칠 수 없어 신 감독을 독촉한 결과다. 생전 신 감독은 급하게 만든 두 영화를 끔찍히도 싫어했다. 그는 납북돼 북한에 있던 시절 “(필름을) 불살라버리라”는 비밀 서신을 남쪽에 보낼 정도였다. 명절이 국내 극장가에서 얼마나 큰 몫을 차지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외면했던 시절에도 명절은 극장이 가장 붐비던 시기였다. 1980년대에는 홍콩 영화들이 명절 극장가에서 관객맞이를 하고는 했다. 쿵후 스타 청룽의 영화가 추석과 설날 극장가를 찾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국 영화가 산업화의 길을 밟는 중에도 명절 대목은 변치 않았다. 한여름이 1년 중 가장 관객이 몰리는 성수기가 됐으나 설날과 추석은 대목의 지위를 놓지 않았다. 한국 영화 3, 4편이 개봉해 흥행 다툼을 벌이고는 했다.
올해 추석 극장가는 좀 낯설다. 한국 상업 영화로는 ‘베테랑2’만 선보인다. ‘베테랑2’가 추석 연휴를 겨냥한다고 알려지면서 개봉을 지레 포기한 영화가 몇 편 있다. 1,341만 명이 본 흥행작 ‘베테랑’(2015)의 후속편이니 겁을 낼 만도 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대박이 유력한 화제작이 있다 해도 출사표를 던지는 영화들이 종종 있었다.
올해 추석 극장가에 신작이 적은 건 ‘학습효과’ 영향이 크다. 지난해 추석 연휴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191만 명)과 ‘보스턴 1947’(102만 명), ‘거미집’(31만 명), ‘가문의 영광: 리턴즈’(16만 명)가 개봉했으나 극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없다. 연휴가 4일로 비교적 짧았던 데다 한국 영화가 몰리면서 출혈경쟁이 됐다는 분석이 따랐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변한 관람 패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올해 추석은 극장가보다 ‘방구석 1열’ 신작이 더 많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는 지난 13일 영화 ‘무도실무관’을 공개했다. 배우 김우빈과 김성균이 주연한 영화다. ‘청년경찰’(2017)로 관객 565만 명을 모은 김주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또 다른 글로벌 OTT 디즈니플러스는 11일 드라마 ‘강매강’을 선보였다. 배우 김동욱과 박지환 등이 출연했다. 글로벌 OTT도 추석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던 거다. 넷플릭스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2021년 추석 연휴에 선보였고,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2022년 설 명절에 공개하기도 했다.
극장가와 OTT의 대조적인 추석 모습은 영상산업의 급변을 상징한다. 대중은 쉬는 날이 이어지면 극장에서든 OTT에서든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어진다. 여러 장단점을 따져 극장을 찾을지 OTT 재생버튼을 누를지 결정한다. 극장은 과연 어떤 관객 유인책이 있을까. 영화 관람료를 내려 극장 문턱을 낮추면 극장이 되살아날까.
불변의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극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영화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가. 극장은 수작 여러 편을 동시에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인가. 영화계로선 고민이 더 깊어질 추석 연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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