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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그만 타고 싶다" "국장은 답이 없다"... ‘밸류업 자해’ 기업들

입력
2024.09.23 08:0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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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밸류업, 무너진 국장]
미 증시, 장기 우상향...국장은 지지부진
개미, 지분 모아 회사에 밸류업 요구까지
두산밥캣-로보틱스 합병서 개미는 뒷전
상폐까지 4년...좀비기업 묶인 돈만 10조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 개장 시황이 표시되고 있다. 뉴스1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 개장 시황이 표시되고 있다. 뉴스1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책으로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지만 일부 국내 기업은 기업 가치에 무신경하거나 스스로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이런 행태 탓에 '국장(국내 주식시장)은 답이 없다'는 교훈을 얻고 국내 증시를 떠나는 주주도 늘고 있다.

22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의 해외 증권(주식·채권) 보관 금액은 19일 기준 1,318억 달러에 달했다. 1년 만에 36%나 늘었다. 이 중 976억 달러가 미국 시장에 투자됐다. 개미들이 미국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엔비디아, 애플 등의 주가는 장기간 우상향하는 반면 국내 기업의 주가는 지지부진한 모습만 보이기 때문이다.

①주가에 관심 없는 회사

국내 투자자의 해외 증권 보관 금액 추이. 그래픽=박구원 기자

국내 투자자의 해외 증권 보관 금액 추이. 그래픽=박구원 기자

참다못한 개인투자자가 기업에 주가 부양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 상장된 호전실업의 개인투자자 20여 명은 최근 발행주식 총수의 8.8%에 해당하는 85만 주를 확보하고 회사 측에 임시주주총회 소집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회사에 ①자사주 매입 및 소각 제안 ②배당금 증액 ③대표이사 급여 삭감 등을 요구하면서, 회사가 주주환원 계획을 발표하지 않을 경우 경쟁사나 외부 투자자에 해당 지분을 넘기겠다고 통보했다.

1985년 설립된 호전실업은 스포츠 의류를 생산해 수출하는 기업이다. 주요 거래처는 언더아머, 룰루레몬 등이다. 2022년 영업이익이 사상 처음으로 400억 원을 넘기고 지난해에도 351억 원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실적을 거뒀지만, 주가는 2021년 하반기 1만5,000원에서 현재 7,300원까지 떨어졌다.

이 회사에 5억 원 이상 투자한 A씨는 "회사 홈페이지를 봐도 2021년 이후 홍보 글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업활동(IR)에 무신경하다"며 "실적이 나쁘면 투자 실패로 이해하겠는데, 현금성 자산도 600억 원 이상 보유하고 재무제표도 우수해 계속 물을 타면서 버티고 있다"고 호소했다.

②대주주 이익만 최우선 고려

두산밥캣 미니 굴착기. 두산밥캣 제공

두산밥캣 미니 굴착기. 두산밥캣 제공

밸류업 역행은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 지배구조 개편을 목적으로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를 합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철회한 두산이 대표적이다.

두 회사의 합병비율이 문제였다. 밥캣은 지난해 매출 9조7,000억 원, 영업이익 1조4,000억 원을 거둔 '현금 창출원(캐시 카우)'인 반면 로보틱스는 지난해 매출 530억 원에 192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 두산 측은 밥캣 1주가 로보틱스 주식 0.63주와 가치가 동등하다고 평가했다. 밥캣 주주들은 적자기업인 로보틱스 주식을 받으면서도, 불리한 합병비율로 인해 더 적은 가치의 주식을 받게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에 비해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두산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밥캣에 대한 지배력을 13.8%에서 42%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기대했다.

논란이 커지자 금융감독원은 로보틱스가 제출한 합병을 위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을 요구했다. 결국 두산 측이 두 회사 간 주식 교환 계약을 해제하겠다고 밝히면서 사안은 일단락됐다. 정작 밥캣 주주들은 지배구조 개편안이 다시 나올 수 있다며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

③좀비기업 넘쳐도 정리 안 되는 시장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좀비기업이 넘쳐 나는데 정리가 제때 안 되는 것도 문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8월 기준 거래정지인 상장사는 100여 개로, 시가총액 총합이 10조 원을 넘어선다. 10조 원의 자금이 좀비기업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이유가 있다. 한국거래소가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고 기업에도 충분한 기회를 준다는 취지로 상장폐지(상폐)까지 최대 4년에 달하는 개선 기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3년간 코스피에서 상폐된 기업은 18곳에 그치지만 신규 상장 기업은 37곳에 달했다. 같은 기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상폐된 기업은 341곳으로 신규 상장사(128곳)보다 많았다.

공시 번복, 의무 불이행 등 불성실 공시도 국내 주식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거래소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코스피에서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된 기업의 수는 2019년 14곳에서 2020년 15곳, 2021년 18곳, 2022년 21곳, 2023년 36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도 8월까지 19건 적발됐다.

안하늘 기자
세종= 조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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