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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울린 정경화, 화나게 한 게오르기우…엇갈린 황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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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지난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6)의 리사이틀과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기우(59) 주연의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 무대가 있었다. 오는 20일에는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80)의 리사이틀이 열린다. 수십 년간 자신의 분야를 대표해온 현역 연주자들이다. 음악가는 영감의 한계를 마주할 때 두려움이 크겠지만, 몸이 영감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할 때 또 다른 좌절을 느낄 것이다. 그들의 '전성기'는 무대에 선 현재의 자신을 평가절하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삶의 에너지가 달라진 후에도 무대에 서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960년대 정경화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동양인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모든 한계를 뚫어 버릴 만큼 강렬했다. 수십 년간 활동을 이어가다 2005년 손가락 부상으로 재활과 치료를 거듭하던 그는 10년 이상 공개 연주를 하지 않았다. 연주자 인생이 마무리된 듯 보였으나 2016년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 연주 투어로 다른 시대를 시작했다. 모든 연주의 완성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2017년 일본 도쿄 산토리홀 '파르티타' 연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관객도, 연주자도 최고의 몰입을 경험했던 공연을 마친 후 대기실로 향하던 그는 처음으로 오열했다. 음악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믿고 인내한 시간은 울림이 컸다.
지난 6일 정경화는 브람스, 프랑크 소나타를 연주했다.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젊은 시절 정경화의 에너지를 그리워하는 관객도 있었겠지만 풍파를 견딘 거장의 시간 속에는 사람의 깊은 곳을 움직이는 다른 힘이 있었다. 그는 앙코르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했다. 많은 것을 함축한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보였다.
지난 5일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로 무대에 선 게오르기우는 또 다른 여운을 남겼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게오르기우는 최고의 프리마 돈나였다. 2012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오페라 '라 보엠'의 미미 역을 노래했을 때만 해도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토스카'에는 '별은 빛나건만'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등 테너와 소프라노를 위한 대표 아리아들이 등장한다. 곡도 아름답지만, 훌륭하게 열창한 가수에게 앙코르(bis) 요청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곡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게오르기우는 소리를 지탱하는 힘이 약해진 모습이 역력했다. 정확한 음정을 내지 못하는 순간에도 음악적 흐름을 위해 호흡을 놓지 않는 부분은 인상적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한평생 살아온 프리마 돈나의 인생을 고백하는 2막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결국 듣기 민망한 연주로 마무리 됐다. 성악가가 들키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보였다. 이번 오페라에서 카바라도시 역의 테너 김재형의 활약은 대단했다. 두 번째 무대였던 8일 공연에서 테너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열창에 감격한 관객들이 앙코르를 요청하자 게오르기우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인 것이다. 음악도 아쉬웠지만, 무대를 내려오는 가수의 태도에도 아쉬움이 더해진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올해 80세가 된 피아니스트 피레스는 20일 장기인 쇼팽과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그는 2년 전 첫 내한 리사이틀에서도 많은 이가 손꼽는 인상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그날의 무대가 완벽해서 좋았을까.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름다웠다. 슈베르트 소나타 21번 D.960 2악장에서 피레스는 악보를 잊은 듯 잠시 멈칫하더니 몇 마디 전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유난히 느린 템포에 소리도 작아지는 것 같아 이러다 연주를 멈추진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소나타 21번은 작곡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쓴 최고의 걸작이다. 파격이라고 할 만큼 조성 변화도 많다. 2악장에서는 인생의 아픔을 경험한 누군가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맑게 갠 하늘을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장면이 그려진다. 평생 담백하고 순수한 삶을 살아온 피레스가 음정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짚어 간 그날의 연주는 슈베르트의 성정과 가장 닮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로는 음악에서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의 인생을 보게 된다. 완벽한 음정과 탄탄한 테크닉도 좋지만 음악가가 살아온 인생이 작곡가의 음악에 투영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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