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퇴행시킬 뿐인 자해적 망상정치
계엄, 독도 지우기 주장에 신뢰만 잃어
책임 있는 수권정당 모습을 회복해야
면책특권 갑피를 쓴 국회의원들의 온갖 같잖은 말엔 이골이 났는데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서 나온 계엄 얘기에는 아연했다. 그것도 TV생중계에서. "최근에 계엄 얘기가 자꾸 나온다. 계엄해제 요구를 막기 위해 계엄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들을 체포, 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얘기도 있다.”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1952년 5월 비상계엄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47명을 연행, 10명을 구속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회기 중 국회의원 불체포특권도 현행범 딱지로 간단하게 짓밟았다. 발췌개헌으로 이승만을 재선시킨 부산정치파동이다. 70년도 더 된 6·25전쟁 때 일이다. 이게 2024년에 현실적 가능태로 소환됐다.
생존 세대에게 그래도 현실감 있는 ’계엄의 추억‘은 79년 10·26 직후부터 81년 전두환 집권까지 15개월이다. 이것도 40년이 훨씬 지났다. 대통령 시해로 인한 계엄을 전두환 세력이 장기 유지하면서 정권획득의 가림막으로 악용했다. 이 기간에 12·12반란과 5·18광주가 있었다. 비전시 상황에서 계엄은 무력을 동원한 권력찬탈 행위다. 그런데 지금 선진국 한국에서 계엄이라니.
계엄은 대통령, 국방장관, 방첩사령관이 모여 성사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광범위하게 실병력을 동원할 방법이 없다. 전군에 휴대폰 SNS가 거미줄처럼 깔린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병력이동은 단 1분도 보안이 가능치 않다. 계엄징후가 알려지면 순식간에 전 국민에 전파되고 정권은 바로 끝장난다. 이런 식의 권력일탈에 대해선 무서운 저항의 이력을 쌓을 대로 쌓은 국민이다. 예전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기무사 계엄계획 문건이 일반 국민에겐 실소 수준으로 가벼이 여겨졌던 이유다.
이걸 국가적 음모라도 포착한 듯 당대표와 지도부가 정색한 모습은 코미디다. 결국 “근거 없는 상상력”이라는 옹색한 자복으로 끝났다. 물론 정치도 상상력의 예술이긴 해도 이 정도면 상상력이 아니라 정치적 망상(妄想)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망상은 근거 없고 비현실적인 주관적 신념을 고집스럽게 확신하는 병증이다.
누구보다 정치적 타산이 빠른 이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이 이런 자해적 망상에 빠져드는 이유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 대표의 사법처리를 겨냥한 국회의원 불체포·면책특권 포기 발언에 즉각적으로 계엄 얘기로 대응한 걸 보면. 박근혜 정권 때의 계엄문건 언급은 당시의 탄핵국면을 떠올린 것일 테다. 사법처리 전에 윤석열 정권의 법적 존립근거를 흔들어야 한다는 강박의 표출 아니고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
또 다른 망상인 독도 지우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윤석열 정권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무리하게 도모한다 해도 도대체 어떤 정권이 자멸로 직결되는 독도영유권을 감히 건드릴 수 있겠나. 이 역시 어떻게든 정권의 헌법적 지위를 훼손키 위한 탄핵 희망걸기에 다름 아니다. 최근 들어 부쩍 심해진 망상이 임박한 이 대표의 사법처리 결과 시점과 무관치 않다는 말이다. 다 쓸데없다. 이 대표 재판은 일정대로 진행될 것이고 이는 정치가 개입해선 안 되는 사법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지난해 기이한 구속영장 기각이 희망을 키웠을 수는 있겠다.)
망상 던져대기는 나라를 퇴행시키고 민주당의 수권능력에 대한 회의만 키우는 백해무익한 전략이다. 이보다는 윤 정권이 헤매는 의료개혁 등 당장 급한 현안 수습에 당력을 모으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대표 측근 5선 의원은 "정치인들이 그런 얘기도 못 하느냐"고 항변한다. 아무리 급해도 정치를 어떻게 이 모양으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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