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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오히려 더 고되다"

입력
2024.09.06 13:00
11면

박연준 소설 '여름과 루비'

편집자주

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절기인 처서를 맞은 22일 부산 강서구 대저생태공원에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팜파스가 만개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시민들이 우산이나 양산을 쓰고 햇빛을 피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절기인 처서를 맞은 22일 부산 강서구 대저생태공원에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팜파스가 만개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시민들이 우산이나 양산을 쓰고 햇빛을 피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이야기를 고를 때 몇몇 설정들은 대놓고 편애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음악을 소재로 한 만화는 모두 좋아한다. 어떤 작품이건 요괴나 귀신이 나오면 일단 본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어린아이가 화자인 소설. 특히 화자가 여자아이라면 나는 이미 소설에 빠져들 준비를 마친 거나 다름없다. ‘여름과 루비’는 이러한 편애로부터 시작된 독서로, 첫 문장은 이렇다. “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주인공을 사랑하고 말았다. 하루하루가 길어서 피로를 느끼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름’의 아버지는 사랑을 독식하고 여름의 고모는 모든 것을 통제하며 여름의 ‘새’엄마는 ‘헌’자식인 여름을 싫어한다. 삶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아니, 어릴수록 삶은 더 고되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고, 그렇기에 충격적이고, 그것은 나쁜 경험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름은 학교에서 만난 ‘루비’를 사랑하게 된다. 루비는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고, 이 때문에 여름은 루비의 집에서만 루비를 만난다. 이쯤에서 여름의 강박적인 행위에 대해 알릴 것이 있다. 여름은 필사한다. 부업처럼, 늘 해야 하는 것처럼. 루비는 책을 읽는다. 쓰는 자와 읽는 자, 그들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글이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곳에 가져다 놓을 힘이 있다. 그 힘은 워낙 강력해서 그저 눈앞에 가져다 놓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색채, 음악, 공기를 쥔 손바닥, 나무 의자의 감촉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 놓는다.”

여름과 루비·박연준 지음·은행나무 발행·264쪽·1만4,500원

여름과 루비·박연준 지음·은행나무 발행·264쪽·1만4,500원

우리가 이 글을 읽으며 경험한 것은 바로 우리의 유년이다. 아름다운 색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그 아래 숨겨둔 못난 밑그림 같은 것. 모든 서툴렀던 사랑과 이별과 실패. 아니, 어쩌면 미성숙한 우리의 존재 그 자체. 그러나 이 모든 ‘첫’은 우리의 근원이고 시작이다. 우리는 그 모든 실패에도 사랑하길 멈추지 않았다. 부지런히 변화했고 부지런히 늘 그 자리였다. 마치 계절처럼.

아침에 일어나니 선선해서 조금 놀랐다. 계절은 정말이지 부지런히도 변화하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여름은 지났지만, 또 영원하기도 하다. 유년이 언제든 되돌아와 나를 헤집어 놓는 것처럼. 그러니 어린아이가 화자인 소설, 특히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면 이미 소설에 빠져들 준비를 마친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송지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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