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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바이오 벤처 3곳 중 1곳은 폐업… ”여전히 옥석 가리기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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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와 2000년대 정보기술(IT)과 함께 벤처 붐을 이끌었던 바이오 기업들. 크게 성공한 곳도 있지만 조용히 사라진 곳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일보는 1세대 창업 기업들을 만나 앞으로 우리 바이오 산업이 가야 할 길을 모색했습니다.
# 2002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ㆍ에이즈) 백신 회사로 출발했던 셀트리온은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대표 기업으로 우뚝 섰다. 에이즈 백신 개발과 이후 선택한 위탁생산(CMO) 사업이 연이어 실패했지만, 글로벌 제약사들의 항체 바이오의약품 특허 기간이 2012년부터 잇달아 만료된다는 흐름을 읽고 바이오시밀러 개발에 뛰어든 덕분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시장점유율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올해는 창사 이후 처음 연매출 3조 원을 돌파할 걸로 예상된다.
# 1999년 설립된 제넥신은 창립 25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내리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제넥신이 보유한 경쟁력은 항체융합 지속형 단백질 기술과 DNA 백신 플랫폼인데, 상용화 문턱을 못 넘고 있어서다. 업계에선 2022년 1,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가 사실상 제넥신의 마지막 대규모 외부 투자자금 수혈로 본다. 올해 이피디바이오 테라퓨틱스 합병으로 돌파구를 마련했지만, 이를 통해 수익을 내는 데 다시 십수 년이 걸릴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바이오 벤처 창업이 시작된 1992년 이후 32년이 지난 지금, '1세대' 창업 기업들의 명암이 뚜렷하게 갈리고 있다. 신기술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며 국내 바이오 산업의 주춧돌을 놓은 기업이 있는가 하면, 창업주 퇴진과 상장폐기 위기를 겪으며 부침에 시달리는 기업도 많다.
한국일보는 국가생명과학정책연구센터의 국내 바이오 벤처 현황 데이터(2021년 기준)에서 창업연도가 1990년대와 2000년대인 기업을 1세대로 보고 이들이 걸어온 길을 약 한 달 간 심층 분석했다. 1세대 바이오 벤처는 총 1,900개에 달하는데, 이 중 휴ㆍ폐업한 곳이 약 30%(529개)에 이른다. 업계에선 산업 성숙을 위해 ‘옥석 가리기’가 더 진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1세대의 '성공 방정식'은 배워야 하지만, 이들에게서 비롯된 부작용이 시장을 왜곡한 면도 크다는 지적이다.
1세대 바이오 벤처가 우후죽순 생기던 1992~2009년은 1990년대 정보기술(IT) 열풍으로 몰린 막대한 투자금이 신산업으로 각광받던 바이오 분야로 흘러 넘친 시기였다. 당시 바이오 벤처들은 핵심 미래 기술을 가졌다는 홍보만으로도 수익화를 위한 뚜렷한 비즈니스 모델 없이 창업이 가능했고, 증권시장 상장으로 막대한 연구개발(R&D) 자금을 모았다. 그야말로 신생 기업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잇따라 위기를 맞았다. 토종 제약사 한미약품이 2015~19년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와 사노피 등에 수출한 기술들이 반환되면서 낙관만 가득했던 바이오 산업을 향한 불안감이 팽배해졌다(1차 바이오 쇼크). 2019~21년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극복을 위해 정부가 치료제 개발에 막대한 돈을 풀자 다시 바이오 벤처 붐이 일었지만, 엔데믹(일상화)과 함께 금리가 상승하면서 기사회생하던 국내 바이오 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2차 바이오 쇼크).
1세대 바이오 벤처의 흥망성쇠는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는지 알 수 있다”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는 “불모지에서 창업한 1세대 바이오 벤처들은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의 창업에 용기를 불어넣었다”면서도 “신약 개발이나 제품화가 아닌 상장을 기업의 목표로 삼으면서 바이오 산업을 향한 대중의 인식을 안 좋게 한 측면도 많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선 1세대 바이오 벤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창업자가 대부분 대학교수 같은 학자 출신이라는 점을 꼽는다. 서정선 마크로젠 회장은 “1990년대 바이오 벤처 붐과 맞물려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립대 교수들의 벤처 창업을 적극 장려했다”며 “서울대 의대 교수 시절 2억~3억 원짜리 연구 장비를 사려면 10년은 걸렸지만, 창업을 하니 며칠 만에 시설을 다 갖출 정도로 자금이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학자 출신이 연구개발에 이어 최고경영자(CEO)까지 맡다 보니 비즈니스 측면에선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헬릭스미스와 제넥신이 꼽힌다. 헬릭스미스는 1996년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국내 최초로 유전자 치료 연구를 시작하면서 창업했다. 연구개발에 성과가 나면서 10년 후인 2005년 코스닥 기술특례상장에 성공했지만, 헬릭스미스의 대표 성과인 유전자 치료제 ‘엔젠시스’의 임상시험이 올해 끝내 실패로 귀결됐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 테라퓨틱스 대표는 “바이오 벤처에서 연구자들의 역할이 크지만, 시간이 갈수록 CEO의 자금 조달이나 ‘피벗(사업 전환)’하는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라며 “헬릭스미스도 거의 30년 간 엔젠시스에만 몰두했는데, 피벗을 좀더 빠르게 고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제넥신은 1999년 성영철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가 창업한 회사인데, 업계에선 제넥신이 출발점이 됐던 원천 기술과 유사한 기술들이 이미 많이 개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적극적인 피벗으로 성공 신화를 쓴 기업엔 셀트리온과 리가켐바이오, 알테오젠 등이 거론된다. 2005년 LG화학에서 포기한 항체신약 후보물질을 가지고 나와 창업한 리가켐바이오는 이후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항체약물접합체(ADC) 기술로 방향을 틀었고, 지금까지 총 13건(8조7,000억 원 규모)의 라이선스 아웃(기술 수출)을 이뤄냈다. 2008년 창업한 알테오젠은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의 효능과 편의성을 개선한 '바이오 베터' 기술을 내세워 매출을 올리면서, 향후 바이오시밀러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체질 개선에 나서는 중이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창업주들이 모두 기업 소속 연구원이나 비즈니스 컨설팅 분야에 오래 몸 담았다는 점이다. 이정규 대표는 “국내 시장 규모가 작기에 결국 세계 시장을 향해 피벗한 회사만 살아남는다”며 “씨젠도 코로나19 진단시약 분야만 너무 길게 가져가 피벗이 좀 늦어진 것 아니냐는 평가가 있다”고 했다. 씨젠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 매출 8,536억 원과 영업이익 흑자 1,965억 원을 기록했지만, 엔데믹과 함께 지난해엔 매출 3,674억 원, 영업이익 적자 300억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1세대 바이오 벤처들에게 국내 상장은 폭발적 성장의 기회이면서 '독이 든 성배'가 됐다. 특히 2005년 기술특례상장 제도가 도입되면서 증시의 문턱이 낮아져 바이오 인프라 생태계가 일본 등과 비교해 크게 성장했다. 한국생명과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술특례상장에 성공한 기업 179곳 중 바이오 업종이 61.5%(110곳)를 차지했다. 국내 첫 코스닥 상장 바이오 벤처인 마크로젠의 서정선 회장은 “2000년 상장한 뒤 거의 한 달 만에 주식이 500원에서 1만8,600원까지 오르면서 매일 저녁 9시 뉴스를 장식했다. 이후 거의 300개 바이오 벤처가 한꺼번에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바이오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묻지마 투자’가 횡행하고, 상장 자체가 목표인 바이오 벤처가 늘면서 세계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건 물론 수익 모델 발굴에도 소홀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1세대 바이오 벤처들 중엔 창업하면 안 될 회사들이 너무 많았다”며 “현재 침체기에 빠진 국내 바이오 산업이 바닥을 찍고 재부상하기 위해선 이런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통한 옥석 가리기가 앞으로 더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장 이후 맞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체질 개선에 나서 생존에 성공한 기업도 있다. 신라젠은 대표 기술인 항암제 '펙사벡'이 2015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글로벌 임상시험 3상을 시작했지만, 효능 입증에 실패하며 2019년 종료됐다. 이후 주가가 급락하며 개인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봤고, 당시 경영진의 배임ㆍ횡령 사건까지 터지며 상장 폐지 위기에 내몰려 바이오 산업의 신뢰를 떨어뜨린 기업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처남이자 대부업체 리드코프 회장도 겸하고 있는 서홍민 엠투엔 회장이 2021년 신라젠을 인수, 신산업을 통한 활로를 모색 중이다. 이정석 신라젠 이사는 “실패를 빨리 인정한 뒤 지배구조부터 수익 모델까지 모두 '리셋'한 게 위기 극복 비결”이라며 “별탈 없이 회사 생명이 연장됐다면 요즘 같은 시기엔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세대 바이오 벤처들 사이에선 식품의약안전처를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인ㆍ허가 절차가 더딘 데다, 기존에 없는 혁신 신약을 개발하는데 유사 사례를 가져오라는 식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국내 신약개발 역사가 짧다 보니 혁신 기술 발전 속도를 행정이 신속하게 따라가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창업하는 국내 바이오 벤처들이 미국으로 넘어가 임상시험을 시도하는 것도 우리나라에선 행정적 제약이 여전하기 때문”이라며 “미국에서 허가를 받고 나면 국내에서 허가를 받는 게 쉬워지기에 일단 미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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