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3년 전 건축계 동료로 만나 결혼한 고유배(34)씨와 장국정(36)씨는 경기 일산의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 맞벌이 부부가 살기 좋은 집이었지만 전세계약 만료가 다가오자 '건축가의 욕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잠깐 머물더라도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자연이 보이는 집에 살고 싶다. 집사가 종일 집을 비우는 동안 고양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당장 집을 짓거나 주택을 고쳐서 사는 건 어려우니 아파트를 사서 직접 고쳐보면 어떨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을 절충해 찾은 답은 '다시, 아파트'였다. 그렇다고 개성 없는 밋밋한 아파트는 원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구조 변경을 포함한 일명 '올수리'를 통해 조금 다른 아파트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사람 두 명과 고양이 두 마리가 사는 집이 꼭 인프라를 갖춘 대단지 아파트일 필요는 없었어요. 다 뜯어고치기로 마음먹었으니 구조나 인테리어도 큰 문제는 아니었죠. 그런 조건을 넘어서니 어렵지 않게 적당한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어요."
부부가 선택한 집은 서울의 오랜 주택지인 서대문구 연희동의 20년 된 아파트였다. 42세대가 거주하는 일명 '나홀로 아파트'는 투자를 생각하면 '좋은 아파트'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파트라는 틀을 깨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유배씨는 "투자 관점에서 단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요소가 장점으로 다가왔다"며 "대단지가 아니어서 시야가 트인 덕분에 거실에서 하늘이 보이고, 뒤편으로는 철길이 늘어선 경치가 마음에 꼭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도전이 시작됐다. '사기 위한' 아파트가 아닌 '살기 위한' 아파트 만들기!
아파트에 거실이 없어도 되나요?
20년 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요즘 아파트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거실과 부엌이 한 몸처럼 붙은 공간이 나오고 양옆으로 방 세 개와 화장실 두 개를 갖춘 전형적인 84㎡ 아파트의 평면이었다. "한마디로 '아파트 같은 집'은 피하고 싶었어요. 익숙한 평면이 어떤 면에서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틀에 박히고 답답한 느낌을 주잖아요. 문틀과 몰딩, 벽지를 바꾼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대대적인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죠."(고유배)
어떤 스타일의 집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구조를 최대한 바꾸고 인테리어도 천편일률적인 '올화이트'를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두 사람 모두 확고했다. 출발은 '콘크리트 노출하기'였다. "공동주택은 안전성 문제로 구조 변경이 자유롭지 않은데 흰색 벽으로 마감하는 순간 모두 엇비슷한 집이 돼 버리죠. 고심 끝에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콘크리트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어요. 벽체만 남으니 층고가 높아지고 공간이 넓어졌어요. 무엇보다 속이 시원했죠."(장국정)
다음은 '거실 비우기'였다. 거실을 중심에 둔 아파트 평면이 집의 동선이나 기능을 축소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웠던 부부는 거실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아파트 거실에 한자리 차지하기 마련인 소파나 TV를 없애고, 천장 조명을 두지 않고 간접 조명과 스폿 조명등만 설치했다. "거실은 가장 넓은 공간이고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야 할 장소인데 '소파가 있을 자리'로 확정돼 버리니 다른 기능은 상상할 수 없게 돼요. 때에 따라 변하는 유연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먼저 비워야 했죠."(장국정)
거실을 없애기로 결정한 이상 거침이 없었다. 나무 바닥을 20㎝가량 높이고, 공간을 분리할 수 있도록 미닫이문을 달았다. 나무와 한지로 공들여 제작한 문을 닫으면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된다. 바깥으로 나오면 마루에 걸터앉을 수도 있다. 전통 한옥의 대청마루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열린 공간이면서 독립된 공간이라서 필요에 따라 제 몫을 하고 있어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면서 편안하게 쉬기도 하고 손님이 오시면 사랑방처럼 쓰기도 합니다."(고유배)
"정답은 없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공간
거실 외의 공간들도 여러 기능이 섞였으면 했다. 먼저 각 방의 문은 없애거나 미닫이문을 닫아 구획을 없앴다. 대신 바닥재를 구별해 기능을 구분했다. 이를테면 방 하나를 온전히 서재로 만든 공간은 문을 없애고 바닥을 테라코타 타일로 마감했다. 흔히 다용도실이라고 부르는 공간과 서재 사이에 있던 창도 과감하게 제거했다. 안전을 고려해 벽은 남기는 대신 창문을 없애고 윈도 시트(창문 앞에 마련한, 의자처럼 앉을 수 있는 공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국정씨는 "좁은 공간이지만 낮은 창턱에 걸터앉을 때 마음이 편하다"며 "이런 공간을 만들고 누리는 것이 리모델링의 묘미"라고 했다.
부엌과 다이닝 공간에는 주문 제작한 대형 테이블을 놓았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은 부부는 주방의 조리기능은 최소화해 군더더기를 없애는 한편, 다이닝 공간은 부부가 각자의 업무를 하거나 손님과도 편안하게 마주앉을 수 있는 공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주방 같은 거실'이다. 유배씨는 "무엇보다 '이 순간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아파트 평면이 지니는 여러 한계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독특한 집이 됐다"고 했다.
가장 돋보이는 공간은 욕실이다. 욕실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아내의 바람을 담아 안방 화장실과 거실 화장실을 터서 하나의 화장실을 만들고, 건식 세면대와 화장실, 습식 욕조로 공간을 분리했다. 화장실 문은 안방과 주방 방향으로 각각 달아서 집을 순환하는 동선을 만들었다. 아내의 로망을 실현한 욕실은 과연 마감재부터 만듦새까지 완성도가 높았다. "이사 온 뒤로는 매일 일어나 씻고 준비하는 바쁜 아침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집에서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은 똑같고,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훨씬 풍요로워진 건 사실이에요. 일상의 밀도가 달라지는 거죠."(고유배)
아파트에서 찾은 '집다운 집'
취향대로 집을 고쳐 산 지 4달째. 부부는 지금도 보는 장소에 따라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집을 즐기는 중이다. 거실 마루에서, 서재에서, 욕실 통로에서 매일 새로운 장면을 발견한다. 빈 공간에는 좋아하는 가구를 신중하게 들였고 때로는 직접 만들어서 천천히 채우는 중이다. 반려묘 두 마리도 자연스레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부부는 "기억과 추억을 온전히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언젠가는 다른 집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서로에게 집중하고 교감할 수 있는 집에 드디어 정착했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획일적인 아파트를 떠나고 싶었던 부부는 여전히 아파트에 살지만, 더 이상 유목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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