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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쉼, 사색의 숨... 깊은 산중에 두 개의 신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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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극 오픈세트장을 비롯해 주변에 문경의 볼거리가 몰려 있다. 인근 단산 모노레일과 최근 개설한 봉명산 출렁다리에서는 주흘산을 비롯한 웅장한 산줄기가 수려하게 펼쳐진다. 반면 문경읍에서 여우목고개 너머 동로면과 산북면은 존재감이 미미하다.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곳인데 예부터 세상과 거리를 둔 불교 사찰과 선비들이 둥지를 튼 곳이다.
문경 시내(점촌)에서 북쪽으로 약 25㎞ 떨어진 산골짜기에 대승사가 있다. 여러 부속 암자를 거느린 문경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일주문에 걸린 ‘사불산’ 현판에 절의 성격이 녹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9년(587)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바위가 산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불암이었다. 왕이 소문을 듣고 와 예를 갖추고 절을 짓게 해 대승사라 사액했다고 한다. 기존 공덕산도 자연스럽게 사불산으로 불리게 됐다.
절은 오랜 역사에 비해 고풍스러움과 거리가 있다. 넓은 주차장은 콘크리트로 포장돼 뙤약볕 열기를 그대로 토해내고, 경내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은 듯한 깔끔한 전각이 이어진다. 대승사는 인조와 경종, 순종 등 조선시대에만 세 차례 중창했으나 1922년과 1955년 큰 화재로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기고 소실됐다.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 1966년부터다.
그래도 절간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만은 그대로여서 하늘로 솟은 나뭇가지 뒤로 문경의 깊고 높은 산줄기가 울렁거린다. 만세루 아래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보이는데 가운데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건물 안팎의 밝기 차이 때문에 보통은 불상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곳 대웅전 불상은 황금빛으로 번들거린다. 사찰의 가장 큰 자랑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이 빛을 발하고 있다. 불상 뒤에 조각으로 표현한 목각탱으로 10개의 판목을 조합해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표현했다.
1675년에 제작해 현존하는 6점의 조선 후기 목각탱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작품이다. 이 목각탱이 더 주목받는 건 올해 112년 만에 개금불사(조각에 금 옷을 입히는 작업)를 마쳤기 때문이다. 일균 주지 스님은 너무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은은한 금빛을 내는 데 공을 들였다고 했다. 전체 공정은 문화재청 감독하에 전문 교수들의 자문으로 6개월간 진행됐다. 해체 후 한약재로 훈증 처리하고 일곱 번 옻칠을 한 후 세 겹으로 금을 입혔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만세루 누각 2층은 북카페로 꾸며 놓았다. 차 한 잔 앞에 놓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장소다. 카페는 무료로 운영하는데 일반 카페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 이용객이 많지 않은 편이다.
사실 대승사는 본당보다 부속 암자가 더 유명하다. 윤필암과 묘적암 두 암자가 왼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윤필암이라는 명칭은 의상의 이복동생 윤필이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한다. 가파른 산자락에 관음전, 산신각, 선불장 등의 전각이 있는데 단연 사불전이 눈길을 잡는다. 승당에 별도의 불상을 모시지 않고 정면 커다란 통유리로 산중턱의 사불암이 보이도록 설계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묘적암으로 향하면 법당 마당의 낮은 담장 너머로 사불암이 눈높이에서 보인다. 암자 앞에 고목 몇 그루가 마른 가지를 하얗게 펼치고 있다. 높고 깊은 산중 암자의 고즈넉한 세월이 느껴진다. 묘적암은 고려 말 선종의 대가인 나옹 화상(1320~1376)이 출가한 곳으로 불가에서 성지처럼 여기는 곳이다. 중국 원나라에서 인도 승려 지공에게 수학한 뒤 귀국해 왕사가 된 승려다. 암자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민가처럼 소박하고 수수하다. 암자로 오르는 길은 한없이 가파른데 주변에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짧지만 고행의 길이자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숲이다.
대승사에서 가까운 또 다른 골짜기에 김룡사가 있다. 사찰 명칭을 딴 주변 지명은 모두 ‘김용사’로 표기하고 있다. 사적기에는 대승사보다 한 해 뒤인 588년 운달 조사가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2012년 조사 결과 대웅전은 1658년에 중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숲으로 비포장도로가 닦여 있어 가기는 어렵지 않다.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높은 축대 위에 보재루와 설선당이 있고, 그 사이로 대웅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의 휘어진 처마 끝으로 운달산 줄기가 연장선처럼 이어진다. 마주 보는 보재루 마루에서 내다보는 풍광도 일품이다. 사찰 바로 앞 운달계곡은 지역 주민들의 피서지다. 해가 들지 않는 그늘 속 계곡물이 얼음장처럼 차다.
사찰 초입에 ‘문경문학관’이 있다. 찾아오기 어려운 이 산골에 왜 문학관을 지었을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관이 아니라 이 마을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권득용(69)씨가 사비를 들여 건립했다고 한다. 이름만 대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유명 작가는 없지만 문경의 산과 내를 적신 지역 문인들을 지도와 연보로 정리해 놓았다. 설립자의 고향 사랑이 물씬 풍기는 전시관이다.
첫머리는 마성면 출신 이원규 작가의 ‘족적’이 장식하고 있다.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 바람 불면 /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 꽃이 피면 파르르 /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지리산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시인이지만 문경 산골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문학관 하나로 그저 그런 촌 동네가 조금 더 깊고 그윽해졌다.
대승사와 김룡사가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점촌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석문정이 있다. 양쪽 깎아지른 암벽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모퉁이다. 문경문인협회 회장을 지낸 고성환씨는 석문을 기준으로 안쪽에는 불교문화가, 바깥에는 선비문화가 융성했다고 진단했다.
석문정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채헌(1715~1795)이 경영한 석문구곡의 제9곡이다. 영조 때 생원시에 급제했지만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석문정을 짓고 풍월을 벗 삼아 산수를 즐긴 인물이다. 계곡을 따라 도로가 나면서 옛 정취를 찾기 어렵고, 배롱나무에 가려진 정자도 방치돼 있어 조금은 안타깝다.
반면 인근 서중리의 근암서원은 근래에 누문과 강당, 동·서재를 복원해 유교문화의 구심 역할을 하고 있다. 우암 홍언충, 한음 이덕형 등 7현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544년 건립됐다. 대문 격인 지원루에 오르면 들판 너머 멀리 천주산과 숫돌봉 능선이 그림처럼 보인다. 서원 인근에는 우암정, 주암정, 경체정 등 오래된 정자가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 주암정은 배 모양의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 앉은 모양새라 여행객의 발길이 잦다. 주암 채익하(1573~1615)를 기리기 위해 인천 채씨 후손들이 조선 현종 14년(1673) 지은 정자다. 지금도 다른 후손이 정자와 연못, 하천 주변을 말끔하게 관리하고 있다.
인근에 올해 초 국내 25번째이자 경북 최초로 람사르습지에 지정된 문경돌리네습지가 있다. '돌리네'란 석회암 지대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녹아 접시 모양으로 움푹한 지형을 말한다. 석회암 지대는 배수가 잘 돼 습지가 발달하기 어려운데, 이곳은 바닥에 석회암 풍화토양인 테라로사가 쌓여 물이 쉽게 빠지지 못하는 지형이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사례로 꼽힌다. 담비, 삵, 하늘다람쥐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 6종,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등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3종을 포함해 731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물다양성도 풍부하다.
습지 탐방은 우곡마을 뒤편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언덕을 넘으면 산으로 둘러싸인 움푹 내려앉은 지형이 나타난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으니 농지를 개간하고 마을이 형성된 건 당연한 수순이다. ‘돌실(도리실)’이라는 마을이 있었지만 이제 흔적이 사라지고, 경작이 금지된 논과 밭도 형체가 희미해지고 있다. 습지 중심부에 덱 산책로가 개설돼 있다. 키 큰 미루나무와 버드나무, 갈대 등이 원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인적 없는 산중에 바람소리, 새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이곳에서 동로면소재지를 거쳐 단양이나 문경읍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달리면 시골 정취 물씬 풍기는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풍광이 수려한 경천호를 지나면 도로변 밭마다 오미자가 알알이 익어가고 있다. 동로면은 전국 오미자의 40%를 생산한다고 자랑한다. 다음 달 13일부터 15일까지 면소재지에서 오미자축제가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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