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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죽인 32세 독립투사 부친... 아직 진실에 가닿지 못한 79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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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척결, 민간인 학살, 간첩조작, 고문치사…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지배하는 동안 이 나라에선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 기본권을 침해하고 인권을 고의로 외면한 권력 남용 사건이 많았습니다. 민주화 정부 이후 뒤늦게 국가가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과오 자인’이 곧바로 사법부의 ‘국가배상 인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은 왜 국가와의 법정싸움에서 판판이 패소하고 있는 것인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구조적 한계와 정부의 고의적 면피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둘 다 가족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①심진표(79)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남해 바다에 수장당했다. ②김동철(가명·64)의 형은 1970년대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진표씨는 아버지, 동철씨는 형이 죽은 이유를 알려고 사건을 캤다. 갖은 방해와 시간의 더께를 헤치며 겨우 가닿은 곳엔 '국가'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었다. 국민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되레 생명을 빼앗거나 그 죽음을 눈감았다는 불편한 진실과 맞서야 했다.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것도, 군부대 괴롭힘을 방치해 병사를 탈영으로 내몰았던 것도, 모두 정부였다.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에 따라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29조 1항)
국가의 잘못으로 피해 본 국민이 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무려 헌법이 정한 기본권이다. 그래서 진표씨와 동철씨도 법원 문을 두드렸다. 돈 받는 게 주목적은 아니었다. 국가 폭력 탓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와 형의 넋을 위로하고, 오랜 기간 '빨갱이 자식' '탈영병 가족'으로 산 가족의 명예를 회복할 최소한의 절차가 바로 나라에 소송을 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법원에서 충격적인 판결을 받아 들었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봤음이 분명한데 왜 사법부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손을 들어준 것일까. 한국일보는 진표씨와 동철씨의 증언을 통해 두 사람과 가족이 살았던 고통의 세월, 지난한 법정다툼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봤다.
"어릴 때라. '아부지 어데 갔노' 경찰관들이 총 들이대던 기억만 나요. 벌벌 떨고 도망 다녔어. 그 뒤로 주변에서 우리를 '빨갱이 집안' 카면서 사람 취급도 안 했다고. 집에선 아부지 얘기 안 하는 기 불문율이었지."
경남 고성군 평동마을에서 본보와 만난 진표씨가 전한 이 사건을, 역사는 마산형무소 재소자 학살(1950년)로 기록한다. 부친 심재인(1918~1950)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독립투사다. 일제 치하에서 고문받고 투옥당했던 그는 독립의 기쁨을 채 5년도 누리지 못하고, 6·25 발발 후 광복된 조국의 손에 죽임당했다. 당시 육군헌병대와 육군정보국 방첩대는 마산형무소에서 이른바 ‘좌익’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을 마산 앞바다에 그냥 던져버리고 말았다.
집단 수장은 7월부터 9월까지 네 차례 이뤄졌다. 그래서 진표씨는 아직 아버지 기일이 언제인지 모른다. 당연히 시신도 못 찾았다. 독재정부 치하에선 아버지 죽음을 궁금해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국가는 2009년 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통해 처음 심재인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인정했다. 사망 59년 만이다. 64세 아들은 발품을 팔며 얼마 남지도 않은 아버지 지인들을 설득했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의 흐릿한 기억 조각을 모으고, 생존자 증언록과 형무소 재소자 기록을 확보했다. 그 노력의 결과, 아들은 이렇게 적힌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전시였다고는 하나 재소자들을 적법 절차 없이 집단 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다.'"
진실화해위는 설치 근거법(과거사법)까지 갖춘 정부 조사기관이다. 그래서 진표씨는 그때 '아버지 명예회복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진표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2014년 7월 1심 판결문에 아버지 죽음에 대한 판단은 단 열네 줄이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실은 인정되나"라는 말로 시작해 "심재인이 희생자임이 명백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2015년 11월 대법원도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진표씨의 패소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에서 얼마나 이기기 힘든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건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민사소송인데, 민사에선 범죄와 피해 입증 책임을 원고가 진다. 국가 상대 소송의 쟁점은 공무원 등의 고의·과실 여부. 그러나 국가가 보유한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운 개인이 스스로 이를 입증하기 쉽지 않다. 정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자료를 주지 않아도 제재 수단이 없다.
관련 자료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파악하기 어려운 과거사 사건에선 더 그렇다. 심씨 사건을 대리한 법무법인 정도의 이명춘 변호사는 "법정에서 가장 믿지 않는 게 증언인데, 과거사 사건은 당사자가 죽고 없으니 증거가 대부분 증언"이라고 설명했다. 진표씨처럼 국가기관으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아도 배상 책임을 받아내지 못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제가 듣고 싶었던 건 딱 한마디였어요. '원고의 승리입니다.' 국방부도 인정했으니까, 판사님들도 그러지 않을까 기대했던 거죠."
경북 경산시에서 만난 동철씨는 아직 형님의 한을 풀지 못했다. 형 김봉철(1956~1977)은 1977년 이병으로 복무하다 탈영해 임진강에서 사망했다. 군은 원인도 알기 전 봉철씨의 죽음을 '변사'로 처리했다. "아버지가 시신을 확인하러 군산에서 연천을 가셨어요. 얼큰하게 취해 오셨어요. 군대에서 술 먹이고 '좋게 끝냅시다' 그랬답니다." 군인이 대통령을 하던 서슬 퍼런 시대였다.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형은 야산에 매장됐고, 장례는커녕 기일도 챙기지 못했다.
'이렇게 끝내선 안 된다'는 생각은 평생 동철씨 마음에 짐이 됐다. 동철씨는 직업 군인으로 일하며 형 죽음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군이 은폐했으니까, 괜히 진실을 찾는답시고 나섰다가 누명 쓸까 봐 함부로 할 순 없었어요."
스치듯이 본 군 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출범 기사가 한 줄기 희망이 됐단다. 가족과 당시 부대 동료들의 증언을 토대로 위원회는 '이병 김봉철이 가혹행위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부 부조리 탓에 부대를 이탈한 뒤 임진강에 빠져 사망했다는 결론이었다. 일단 절반의 성과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법원은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탈영 및 사망 이후 조사·수사 과정에서 국가의 위법한 직무 집행이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게, 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 부대 지휘관이나 간부들의 가혹행위로 인해 심리적 불안감이 있었고, 이로 인해 탈영을 선택했다는 것까지만 법원에서 인정됐다. 결국 가혹행위와 탈영이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인정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올해 4월 17일 동철씨의 패소를 확정했다. 동철씨도 진표씨와 같은 처지가 됐다. 죽음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도, 입증 책임을 온전하게 개인이 지도록 한 국가 상대 소송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심진표·김동철의 패소에서처럼, 국가를 상대로 하는 법정 싸움은 험난하다. 진표씨 재판에선 잘못된 사망신고 날짜가 결정적 패소 원인이 됐다. 재판부는 "사망 경위 진술이 막연하고, 제적등본에 심재인이 (1950년이 아니라) 1949년 6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된 점 등을 볼 때 희생자임이 명백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 부실하기 이를 데 없던 행정기록을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임에도, 이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왜 행정청은 아버지 사망일을 1949년으로 기록했을까. 진표씨 설명은 이렇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후에야 사망신고 하러 갔는데, 면사무소에서 그냥 아무 날짜로 신고해 버렸어. 시체도 못 찾았으니깐." 빨갱이 낙인이 찍힌 가족 입장에선 사망 날짜는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방치했던 행정 오류가 훗날 재판에서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무자비한 공권력으로 만행을 자행한 국가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표씨는 기자에게 '부친기(父親記)'란 제목이 붙은 수첩을 건넸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고, 이어 국가와 힘겨운 싸움을 한 과정을 적은 이 기록에서, 아들은 억울한 죽음의 책임을 묻는 과정이 왜 이렇게 고되고 힘든지를 묻고 또 물었다. 수첩의 마지막 기록은 2015년 대법원 패소 확정이었다. 더 쓸 내용이 없었다. 정정된 사망 기록을 토대로 최근 진실화해위에 한 번 더 진정을 넣었지만, 재심 사유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이젠 더 방법이 없는 것인가.
"구제라는 게 별게 아니잖아요. 벌써 2009년에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법원에서 지니까 허망해요. 진실이 바르게 풀릴 때까지 싸워보고 싶었는데, 이제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서른둘에 돌아가신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려고 뛰는 79세 아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거사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국가배상 소송의 소멸시효 문제를 다룬 기사로 이어집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82017230000270?did=NS&dtyp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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