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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들은 평등했다"....부산 비엔날레가 해적 사회에서 예술의 길을 찾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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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부산 중구 동광동의 한 건물에 정체불명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규칙적인 기계음 위에 얹은 남성의 목소리는 주술처럼 읊조리다가 절규로 변했다. 기계음과 목소리의 합창은 컴퓨터가 의도적으로 내는 굉음처럼 기괴했다. 올해 부산 비엔날레에 참여한 싱가포르 작가 바니 헤이칼이 선보인 즉흥 보컬 퍼포먼스 '익명의 저주 발췌'의 한 장면이다.
이 공연으로 올해 비엔날레의 문을 연 공간은 부산 원도심에 자리한 근대건축물인 '한성1918'. 1918년에 건축돼 한국 최초의 근대은행인 한성은행 건물로 사용되다 최근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이다. 골조와 조명을 드러낸 건물 곳곳에 니카 두브로브스키, 홍진훤, 프레드 모튼·스테파노 하니·준 리 작가의 영상·사운드 작품이 설치된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인 듯 보였다.
17일 개막한 2024 부산 비엔날레는 주 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 외에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 등 4곳에서 열린다. 은행 금고를 미술관으로 만든 부산근현대역사관의 금고미술관, 근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양옥집 초량재 등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독특한 전시 공간이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감각의 틀에서 벗어난 전시'라는 올해 주제 의식을 담은 전시 공간의 변주인 셈이다.
1981년 '부산청년비엔날레'로 출발한 부산비엔날레는 한국을 대표하는 격년제 국제 미술제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베라 메이, 필리프 피로트가 감독을 맡았고, 36개국 78명의 작가가 참여해 349점 작품을 선보인다. 주제는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다. 두 감독은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쓴 책 '해적 계몽주의'에서 영감을 얻었다. '해적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 계몽주의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는 통념과 달리, 해적 사회에서 그런 실천이 먼저 이뤄졌음을 밝힌 책이다.
이들은 해적 공동체의 유연성에 주목했다. 태풍과 같은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선원이 그때그때 리더를 맡았다. 베라 메이 감독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여러 곤경(어둠) 속에서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과 틀에서 벗어나 다문화적이고 포용적이며 평등한 예술적 대안을 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은 독특한 이력의 작가들이 점령했다. 경남 양산 통도사성보박물관장을 지내고 '한국의 불화' 40권을 집대성한 송천 스님,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외국 여행을 하며 얻은 재료로 작업하는 이두원 작가, 가정주부로 살다 40세에 미술가가 된 윤석남 작가 등 '해적처럼' 작가가 된 이들이다. 송천 스님은 부산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높이 8m, 폭 2m에 달하는 대형 불화로 불교적 유토피아를 소개했다. 현대미술관 야외 마당에 캐러밴을 세운 이 작가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에서 가져온 날것의 재료로 빚은 독특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박수지 부산비엔날레 협력 큐레이터는 "공개된 작가 명단을 보고 '일부러 유명 작가는 제외했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며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해방 공간을 구축해온 작가를 일일이 발굴해 전시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국적도 다양하다. '해적 계몽주의'의 기초가 된 베치 미사리카 왕조의 후손인 마다가스카르 출신 디나 노메나 안드리아리만자카를 비롯해 세네갈, 자메이카,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작가들의 영상·설치 작품 등이 대거 나왔다.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이란, 아시아 예술계에서도 비주류인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쉽게 접할 수 없는 제3세계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올해 부산 비엔날레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24 대한민국 미술 축제'에 동참한다. 현장 매표소에서 광주비엔날레와 통합 입장권을 내면 관람료 2,000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1만6,000원)을 제외한 모든 전시관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전시는 올해 10월 20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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