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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우선" 돌아온 전설의 CEO, 디즈니 구원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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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애너하임 혼다센터. 전 세계 디즈니 팬들의 축제 'D23'의 메인 행사 격인 엔터테인먼트 쇼케이스가 시작되자 희끗한 머리의 남성이 무대 위로 걸어나왔다. 월트디즈니컴퍼니(이하 디즈니)를 이끌고 있는 밥 아이거(73) 최고경영자(CEO)였다.
1만5,000석이 빈자리 없이 꽉 찬 데 감격한 듯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하던 그는 "이곳 D23에 돌아오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이 무대에 서는 게 "5년 만"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아이거가 등장할 때 기립박수로 맞이했던 팬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와 박수로 반응했다. 뒤이어 깜짝 등장한 '아바타' 시리즈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 할리우드 배우 드웨인 존슨·린지 로언·갈 가도트 등이 받았던 환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현장 취재진 사이에서는 "연예인도 아닌 CEO에게 이렇게 열광하는 경우가 있었나"라는 평가가 나왔다.
디즈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단 한 명만 대자면 101년 전 이 회사를 창업한 고(故) 월트 디즈니를 꼽는 사람이 가장 많을 듯하다. 그러나 아이거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다. 디즈니를 탄생시킨 건 월트 디즈니지만, 디즈니를 지금의 '콘텐츠 왕국'으로 재탄생시킨 게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아이거에겐 그래서 전설이라는 수식이 뒤따라 다닌다. 미 ABC방송 출신인 그는 1999년 디즈니 인터내셔널 사장으로 옮겼다. 이어 2005년부터 약 15년 동안 디즈니 CEO를 지내며 '토이스토리',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 등을 만든 애니메이션 픽사스튜디오(2006년), '어벤져스' 시리즈를 제작한 마블스튜디오(2009년), '스타워즈'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루카스필름(2012년), 20세기폭스(2019년) 등을 잇따라 인수했다. 그의 재직 기간 디즈니 주가 상승률은 400%가 넘었다. 말 그대로 디즈니의 황금기를 이끈 뒤 2020년 밥 체이펙 전 CEO에게 자리를 넘겼다.
그렇게 전설로 남을 뻔했는데, 디즈니는 퇴임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22년 말 아이거를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시켰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 된 것이다.
"과연 할리우드 시나리오급 반전이다." 디즈니 이사회가 체이펙을 축출한다고 발표한 2022년 11월 미국 경제매체 CNBC는 아이거의 복귀를 이렇게 평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체이펙을 후임으로 낙점한 게 바로 아이거라서다. 할 만큼 하고 떠난 아이거를 디즈니가 재소환한 이유는 명확했다. 그때 그 시절로 디즈니를 되돌려놔달라는 것이다.
아이거가 떠난 뒤 디즈니에는 악재가 중첩됐다. "좋은 소식은 집에 아빠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 좋은 소식은 집이 불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아이거 복귀 당시 디즈니의 한 고위 임원이 블룸버그통신에 했다는 이 말은 당시 디즈니가 처해 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건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의 급습. 디즈니의 사업 부문은 크게 영화·애니메이션 등 제작이 포함되는 엔터테인먼트 부문과 엔터테인먼트 부문에서 나오는 IP를 이용해 각종 소비재를 판매하고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경험 부문으로 나뉘는데, 불운하게도 두 사업 부문 모두 팬데믹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더는 극장에, 테마파크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가 잘되는 것도 아니었다. 팬데믹 기간 경쟁자인 넷플릭스는 구독자 수와 매출 등에서 폭발적 성장을 이뤄냈지만, 디즈니+는 외려 적자폭이 점점 커졌다. 사실 디즈니+는 이미 시장 경쟁이 치열할 대로 치열한 2019년에 출시된 서비스라 초반 적자가 당연했다. 그런데 다른 사업 부문이 전체적으로 부진해지는 불운이 겹치면서 시장이 디즈니+의 적자를 인내하고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디즈니+가 디즈니 주가를 더 끌어내리는 골칫덩이가 된 것이다.
가뜩이나 사업이 어려운 상황에 논란도 많았다. 2021년 디즈니는 팬데믹 탓에 신작 '블랙위도우'가 극장에서 많은 관객 모으기가 어려워지자 극장 개봉과 동시에 디즈니+를 통해 이 작품을 공개했다. 그런데 이것이 주연 배우 스칼릿 조핸슨의 격노를 불렀다. 조핸슨은 작품 출연 계약 당시 디즈니 측과 극장 성적에 비례하는 보너스를 받기로 했는데, 디즈니가 협의 없이 OTT에 작품을 동시 공개하면서 극장 흥행 수익이 잠식당했고 그 결과 자신의 잠재적 수익에 큰 손실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디즈니와 조핸슨은 조핸슨이 소송을 제기한 지 두 달 만에 결국 합의에 이르렀으나, 이 사건으로 "체이펙이 거물급 인재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데 있어 아이거만큼 능숙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남겼다"고 CNBC는 전했다.
결정적으로 디즈니의 위기를 부른 것은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 논쟁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PC주의는 용어 등 사용에 있어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운동이다.
체이펙 시절 디즈니는 '흑인 인어공주', '라틴계 백설공주' 등을 내세운 실사 영화 제작에 나선 데 이어, 공화당 소속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갈등을 벌이며 PC주의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22년 3월 플로리다에서 동성애 관련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돈 세이 게이'(Don’t Say Gay) 법이 통과하자, 체이펙은 이에 반대 성명을 냈다. 이후 주정부가 플로리다에서 디즈니가 운영 중인 테마파크(디즈니월드)의 개발권 등을 제한하겠다고 나서자 디즈니는 "정치적 보복"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은 결국 1년여 만인 지난 3월 합의에 이르렀으나, 이 사건은 디즈니의 PC주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디즈니로부터 더 등 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위기의 디즈니는 결국 전설을 다시 불러냈다. 돌아온 아이거의 일성은 "수익 극대화". 아이거 복귀 후 디즈니에는 칼바람이 불었다. 수익성 개선을 목표로 실적이 부진한 마블 주요 임직원 등을 전격 해임했고,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OTT 사업에도 변화가 생겼다. 구독료를 인상하고, 디즈니의 또 다른 OTT인 '훌루'를 디즈니+에 통합시켰으며, OTT에 고정 시청자를 담보해 주는 스포츠 중계권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수년간 디즈니가 비판받은 주된 요인 중 하나였던 PC주의에 대해서는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아이거는 지난해 말 한 서밋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창작자들이 자신들의 1순위 목표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 같다"며 "우리는 즐거움을 주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메시지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이거가 돌아온 직후 더 가라앉는 듯했던 디즈니호는 차츰 정상궤도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지난해 10월 약 10년 만의 최저 수준인 79달러대까지 떨어졌던 디즈니 주가는 89달러로 다소 반등한 상태다. 올해 2분기 디즈니는 디즈니+ 출시 후 처음으로 스트리밍 사업에서 첫 흑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당초 흑자 전환 시점으로 예고했던 3분기보다 한 분기 앞당긴 것이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더 마블스' 등 대작들이 줄줄이 흥행 참패했던 지난해를 뒤로하고 최근 '인사이드 아웃2'와 '데드풀과 울버린'이 연속해서 글로벌 흥행에 성공하며 영화 사업에서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기도 했다.
디즈니 이사회는 지난달아이거의 임기를 기존 2024년 11월에서 2026년 12월로 2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2021년 3월 200달러에 육박했던 주가가 시장의 기대만큼 회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디즈니를 더 성장시킬 후임 경영자를 찾는 것도 남은 임기 동안 아이거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실리콘밸리에는 아이거의 '진짜 임무'가 회사를 어느 정도 되살려놓은 뒤 일부 사업 부문을 애플 등에 매각하는 것이라는 설이 벌써 몇 년째 떠돌고 있다. 이게 뜬소문인지 아닌지, 그가 2기를 마무리한 뒤에도 '전설'로 남을 수 있을지는 향후 2년이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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