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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연구가 아니라 국가 살인의 한 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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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제국’이던 시절,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1815년 이후 1차대전까지 약 100년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의 영국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게 성병이었다. 사학자 데이비드 애번스(David Evans)가 보기에 성병은 제국의 몰락을 불러올 수 있는 ‘인종적 독약(racial poison)’ 중 하나였다. 성병이 피식민지인들의 더러운 몸을 통해 전파된다고 여긴 그들은 1860년대부터 전염병법 등 법으로 성병에 맞섰고, 1913년 성병 퇴치를 위한 ‘왕립위원회’까지 설립했다.
이듬해 시작된 1차대전으로 성병은 엔데믹 사태로 확산됐다. 1918년 독일 봄 공세(루덴도르프 공세)가 시작된 3월 21일 영국 정부는 전시 ‘국토방어법(DRA)’에 “성병 감염자가 폐하의 군인에게 성관계를 권유”만 해도 기소한다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했다. ‘기적의 항생제’ 페니실린이 등장하기(1928) 전이었다.
성병 후폭퐁은 전후에도 지속됐고 사정은 다른 참전국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미국 매독 환자는 시민 10명 중 1명꼴에 달했고, 매년 50만 명의 신규감염자가 발생했다. 결핵의 2배, 소아마비의 100배에 달하는 확산 속도였다. 기질성 심장질환 사망자 약 18%의 실제 사인이 매독 합병증이었고 정신병원 수감자의 최대 20%가 3차매독 환자였다. 매년 신생아 약 6만 명이 매독균을 지닌 채 태어났다.
하지만 ‘금주법(1919~33)’으로 상징되는 광폭한 사회도덕주의는 ‘타락의 질병’에 대한 공론화 자체에 반발했고, 더럽혀진 환자는 치료할 가치가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는 병원들도 적지 않았다. 1934년 11월 ‘공중보건의 미래’를 주제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려던 뉴욕주 보건국장(Thomas Parran)이 성병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는 방송사 지침에 반발해 출연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 1920년 400만 달러 규모였던 미 연방 공중보건국(PHS) 성병부 예산은 29년 대공황까지 겹치며 6만 달러 수준으로 격감됐다.
미국 보건의료윤리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사건으로 각인된 ‘터스키기(Tuskegee) 매독 실험(공식 명칭 ‘니그로 남성의 방치된 매독에 대한 터스키기 연구’, 1932~72)’이 대충 저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최소 예산으로 매독의 단계별 증상과 인체 각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인간 생체 실험이었다.
1932년 가을, 남부 앨라배마 메이컨(Macon)카운티 터스키기 일대에 다량의 전단지가 뿌려졌다. “나쁜 피(bad blood)로 인해 고통받는 흑인”을 공짜로 검사·치료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류머티즘, 만성 소화불량, 두통 등이 ‘나쁜 피’ 때문에 생기는 병이라 여기던 이들, 즉 저학력 흑인들이 대상이었다. PHS는 검사 당일 무료 식사와 교통비를 제공하고 부검 동의서에 서명하면 장례 비용도 지급한다며 회유했다. 그렇게 남성 600명(감염자 399명, 비감염 대조군 201명)이 선발됐다. 의사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의 피를 뽑고 검진한 뒤 아스피린 등 가짜약을 처방했고, 뇌척수액을 뽑는 요추천자 검사를 하면서도 새로운 치료법이라고 속였다.
그 실험 연구가 PHS와 연방 감독기관인 전염병센터(CDC, 현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수많은 당국자들, 현장 의사 등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조·묵인 속에 1972년 5월까지 만 40년간 이어졌다. 그렇게 128명이 매독(합병증)이란 병명조차 모른 채 숨졌고, 배우자 최소 40명이 감염되고 선천성 매독 신생아 19명이 태어났다. 매독 치료에 페니실린이 널리 쓰인 건 1940년대 초부터였다.
미국의 역사는 내부고발자들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7년 미 해군 제독의 상습적인 포로 학대를 10명의 수병이 반인권행위로 고발한 일이 있었다. 대륙회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듬해 7월 30일 미국 최초 세계 최초의 내부고발자 보호법인 ‘연방청구법(Federal Claims Act)’을 제정했다. 그렇듯 미국 역사에는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꾼 여러 내부고발자들이 있었고, 그들 덕에 정관계와 재계, 군대, 경찰, (과)학계 등의 부정과 관행적 비리가 드러나고 민주주의와 정의-인권이 개선돼왔다.
연구를 빙자한 저 끔찍한 국가적 보건의료 범죄를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미국 의료연구의 윤리 지침을 새로 쓰게 한 것도 단 한 명의 내부고발자였다. 진상이 밝혀지고도 근 40년이 지나서야 존재와 신원이 밝혀진, 당시의 공중보건 홍보원 피터 벅스턴(Peter Jan Buxtun, 1937.9.29~ 2024.5.18)이 별세했다. 향년 86세.
1965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에나 진학해볼까 하며 소일하던 만 27세 청년 벅스턴은 PHS의 성병 예방 홍보원 구인 전단지를 보고 곧장 지원했다. 술집과 유곽 등을 돌며 홍보물을 나눠주고 증상자를 찾아 치료를 권하는 게 주된 업무였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던 그에겐 딱 맞는 일거리였다. 어느 날 한 카페에서 그는 동료들로부터 ‘앨라배마에서 최근 일어난 일’을 듣게 됐다. 정신 이상 증상이 심해진 한 3차매독 환자가 가족들이 평소 알고 지내던 딴 동네 의사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맞는 바람에 PHS가 공들여 온 실험을 망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나눠주던 종이성냥 홍보물 문구, 즉 이런저런 증상이 있으면 곧장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으라는 것과 상반되는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던 벅스턴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CDC 홍보부에 전화를 걸어 터스키기 실험 연구 개요를 문의했다.
당시에는 연구 보안의식이 허술했던지, 정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지, 담당자는 10여 건의 실험 데이터를 포함한 자료 사본을 그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벅스턴은 공공도서관에 들러 나치 생체실험 의사들의 전범재판 기록과 46년 국제사회가 정한 뉘렌베르크 의료 윤리 강령(Nurenberg Code)을 찾아 읽었다. 피실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필수 전제(제1항)로 규정한 강령의 요지는 "일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해로부터 피실험자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였다.
체코 프라하 출신 유대인인 벅스턴(본래 성은 Buxbaum)에겐 그 실험이 남일이 아니었다. 가정용품 제조공장을 경영하던 그의 일가는 부동산 등 재산을 포기한 채 나치를 피해 38년 미국으로 이민, 오리건주 윌라메트 계곡의 한 농장에 어렵사리 정착했다. 그는 오리건대에서 유럽사(독일사)를 전공했다.
벅스턴은 나치 생체실험과 터스키기 실험을 비교한 보고서를 작성, 66년 11월 지부 책임자를 거쳐 PHS 성병부장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에게 보냈다. 당시 지부 책임자는 “만일 그들이 너를 해고하거나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도 내 이름은 언급하지 말아 달라. 내겐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이 직장이 필요해”라고 했다고, 그는 2016년 미네소타대 윤리철학자 칼 엘리엇(Carl Elliott)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이듬해 3월 성병 관련 공중보건학계 총회가 열린 애틀랜타로 소환돼, 저 인터뷰에서 "쥐새끼 같은 관료"라고 평한 브라운과 40년대 과테말라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끔찍한 매독 생체실험을 자행한 바 있는 악명 높은 외과의사 존 커틀러(John Cutler) 등으로부터 호된 질타(tongue-lashing)를 당했다. 커틀러는 그에게 “이봐 젊은이.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우리가 흑인 소작농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고? 그들은 자원자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PHS는 그를 해고하지 않았고, 그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67년 길고도 무더운 여름’의 흑인 폭동은 이듬해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한층 격화했다. 그해 11월, 벅스턴은 다시 항의 편지를 썼다. 실험 대상자가 전원 흑인인 사실, 매수 혹은 기만적 동의에 근거해 생체 실험이 진행돼 온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정치적 다이너마이트’가 될 테니 즉각 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PHS는 외부 인사들을 포함한 독립 검토위원회를 꾸렸지만 위원들은 표결로 연구 강행을 결정했다. 감염자 사망률이 대조군보다 23% 이상 높던 무렵이었다.
벅스턴은 70년 초 PHS에 사표를 내고 현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인 해스팅스(Hastings)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리고 72년, AP 통신사에 갓 입사한 친구(Edith Lederer)에게 터스키기 실험의 전모를 알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자료 일체를 건넸다. 그 자료는 지국장을 거쳐 워싱턴D.C 본사로 전달됐고 한 노련한 탐사보도 기자(Jean Heller)의 확인 취재가 시작됐다. ‘연방 정부의 연구 때문에 40년간 치료 받지 못한 매독 희생자들’이란 제목의 AP 특종 기사가 그렇게 1972년 7월 25일 ‘워싱턴 스타(Washington Star)’란 매체에 처음 실렸고, 다음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요 매체 1면 톱기사로 도배됐다. 테드 케네디 의원의 발의로 곧장 상원 청문회가 소집됐다. PHS측은 청문회에서도 “의사와 공무원들은 과학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의 일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고, 벅스턴은 "내 눈에 그 연구는 제도화된 살인의 한 형식일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대리한 집단소송에 연방 정부는 74년 1,000만 달러 배상금으로 원고측과 합의했다. 감염 생존자 74명에겐 각 3만5,000달러, 유족에겐 각 1만5,000달러가 지급됐다. 의회는 74년 국가연구법을 제정, 인체 실험-연구에 관한 규정을 재정립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고 별도 임상시험 감독기관(OHRP)을 설립했다. 그 일로 기소된 공직자와 연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이 연구자들은 터스키기 실험으로 10여건의 논문까지 발표했다. 1964년 12월호 ‘내과의학(Internal Medicine) 저널’에 실린 그들의 논문을 읽고 단 한 사람, 디트로이트 헨리포드 병원 심장내과의 어윈 쇼츠(Irwin Schatz, 1931~2015) 박사가 항의했다. 그는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훈련받은 의사들이 어떻게 매독의 자연사를 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치료를 보류할 수 있느냐”고 편지에 썼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그의 편지는 진상이 드러난 뒤 한 매체(월스트리트저널)의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우연히 발견됐다. 그보다 앞서 PHS의 흑인 통계학자 빌 젠킨스(Bill Jenkins)가 60년대 저 실험에 항의했다가 상사에 의해 묵살된 적이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터스키기 실험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피실험 생존자가 8명 뿐이던 1997년이었다. 사과의 배경에는 저 실험 트라우마로 인한 흑인 사회의 정부 보건정책에 대한 불신이 백신 정책 특히 AIDS 예방 정책의 주요 걸림돌이라는 관련 단체의 성토가 있었다.
저항의 70년대를 거치며 내부고발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대폭 개선됐다. ‘유다의 후예’라는 배신자 낙인보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늘어났다. 내부고발자 흠집 내기나 보복 수법도 교묘해졌고, 그들을 보호-보상하기 위한 법·제도도 진전돼왔다. 미 의회는 2011년 이후 매년 미국 최초 내부고발자 보호법이 제정된 날을 ‘내부고발자 감사의 날(Whistleblower Appreciation Day)’로 선포하고 기념행사를 연다. 내부고발의 가치와 중요성을 사회에 알리고, 유무형의 보복행위 등에 대한 법률적 조언과 소송을 돕는 ‘전미내부고발자센터(WWC)’ 등 시민단체도 여럿 생겨났다.
그런 변화와 별개로 세상은, 2009년 웰슬리대 사학자 수전 리버비(Susan Reverby)가 2009년 논픽션 ‘터스키기 조사(Examining Tuskegee)’를 출간하기 전까지는, 저 실험도 내부고발자 덕에 알려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AP 첫 보도를 비롯한 어떤 기사에도, 이후 여러 사학자와 의료윤리학자 등이 출간한 책들에도 벅스턴이란 이름은 없었다. 제임스 존스(James H. Jones)의 81년 논픽션 ‘Bad Blood’에 테드 케네디와 함께 찍은 그의 사진이 실렸지만 단지 청문회 증언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미국 시민들은 리버비의 책을 통해 비로소 “권력의 부정-불의에 맞서 핍박과 희생을 무릅쓰며 민주주의와 정의-인권을 수호한 영웅”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에겐 때늦은 인터뷰와 강연 요청 등이 쇄도했다.
윤리학자 엘리엇에 따르면 조직적 불의를 방관하는 이들에겐 흔한 변명 두 개가 있다.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과 ‘내 권한과 책임 밖의 일’이라는 말. 그 바탕에는 물론 보복-불이익에 대한 공포와 나만 손해라는 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 했던 반성적 사유 없는 기계적 순응을 엘리엇은 ‘대리자 상태(agentic state)’라 명명했다. 1961년 예일대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행한 여러모로 충격적인 실험이 보여준 것과 같은 권위-권력에 복종하는 대리자의 마비된 자율성을 일컫는 말이다.
벅스턴은 개인의 자유를 절대시하며 총기· 마약 등 정부의 간섭 일체에 반대하는 자칭 우파 리버테리언(자유지상주의자)이었다. 사전적 의미에서 리버테리언에겐 복종해야 할 권위-권력이란 없다. 외동아들이어서 꽤 든든한 유산을 물려받은 데다가 소송을 통해 나치에게 몰수당한 체코의 가족 재산 일부를 되찾은 덕에 그는 직장에 별 미련도 없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도 평생 변호사 사무실을 열거나 취업하지 않았고, 대신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골동품 무기나 골드러시 시대의 도박용품 등을 구입해 되파는 일을 취미 삼아 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지만 대신 주변에 친구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한 오랜 친구(David Golden)는 “피터는 재치 넘치고, 세련되고, 무척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엘리엇은 엘리엇은 그를 "무척 의지가 강하고 분노로 가득찬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평생 얽매인 데 없이 산 그였지만 단 하나, 그는 말년까지 터스키기 만행에 좀 더 일찍, 더 격렬히 맞서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고 한다. 그가 초대받은 강연장 등에 자주 동행했다는 한 친구(Angie Bailie)는 “피터는 단 한 번의 강연도 눈물을 참지 않고 끝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2018년 존스홉킨스대 포럼에서 그는 내부고발을 감행한 도덕적 힘을 어디에서 얻었느냐는 질문에 “힘이 아니라 '무대뽀(stupidity)'였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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