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한국인은 가장 익숙한 외국어가 영어라서 딴 언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도 종종 영어를 기준으로 바라본다. 예컨대 독일어 차용어 '알레르기'가 표준어인데 영어 발음에 가까운 '알러지'나 '앨러지'도 흔히들 쓴다. 일각에서 후자로 쓰는 것까지 딱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게 옳다고 주장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원래 그리스 어근을 조합해 독일어에서 생긴 용어가 알레르기고, 한국어는 그걸 받아들여 잘 써왔다. 다만 알러지가 대세가 된다면 표준어도 그리 바뀔 수는 있을 것이다.
외래어야 그렇다 치겠지만 이따금 영어 잣대를 들이밀며 한국어의 특성을 타박하는 이들도 보인다. 그러니까 영어는 좀 아는데 정작 한국어는 제대로 모른다는 소리다. 이런저런 언어 현상을 두고 한마디 보태려면 여러 언어에 능통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근데 한국어 얘길 꺼내면서 영어부터 떠올리는 게 과연 알맞을지는 생각 좀 해봐야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어는 eat water라 하지 않으니 '물(을) 먹다'가 틀렸다는 식이다. 웬만하면 이런 소리는 웃어넘기고들 말겠지만 별 생각 없이 듣다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깜박들 넘어갈 법도 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약 먹다' 갖고는 뭐라지 않는다. 영어는 약에 take를 쓰니까 이걸 한국말에 딱 갖다 붙이긴 애매할 거다. 한국어 '들다(드시다)'는 '먹다/마시다' 다 되니 우연찮게 take의 기본 의미(잡다, 받다 따위)와 이어지긴 한다. 점심에 빵 먹고, 저녁에 국수 먹으면 영어 기준으로 rice가 아니니 '밥' 먹은 게 아닌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언어는 다양하다. 수많은 언어가 제각각의 모습이다. 한국어 '먹다'는 '마시다'도 포함하기에 물, 술, 음료, 액체 등도 '마시다'와 더불어 '먹다'를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 태국어, 캄보디아어, 벵골어, 페르시아어 등 아시아 몇몇 언어도 '먹다/마시다'의 양상이 비슷하다. 한국어는 나이/마음/1등/한 방/한 골/겁/욕/뇌물 따위에도 '먹다'가 붙는데, 이런 숙어도 페르시아어 '욕먹다', 태국어 '뇌물 먹다'처럼 비슷한 꼴이 있다. 영어 eat도 이런저런 숙어가 있다. 식언(食言: 밖에 낸 말을 도로 입 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약속한 말대로 지키지 아니함)과 eat one's words(잘못 말했음을 인정하고 취소/번복하다)처럼 비슷한 듯 살짝 다른 말도 있다.
한국만이 아니고 어디든 위상이 높은 외국어를 기준으로 삼아 자국어를 재단하는 양상은 비슷하게 있다. 영어도 예컨대 Who do you live with?가 틀렸고 라틴어처럼 With whom do you live?만 옳다는 규범문법주의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왕왕 있으나 이젠 별로 힘을 못 쓴다. 둘 다 맞고 전자는 영어 등 주요 게르만어의 전형적인 구문이며 더 자연스럽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자연환경을 마냥 그대로 두기보다는 사람에 맞게 조금씩 바꾸기도 하듯이, 언어도 다들 함께 쓰려면 다듬고 가꿀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도 영어든 뭐든 딴 언어들도 참고해 좋은 점을 받아들인다면 나쁠 것은 전혀 없다. 다만 한국어는 이렇지만 영어는 저러니까 영어가 옳다 따위처럼 영어 사랑에 화르르 불타오르기보다는 잠시 냉수 먹고 속부터 차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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