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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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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병법에 ‘36계 줄행랑’이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땐 도망을 치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기동전에 고립된 연합군 40여만 명의 됭케르크 철수나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의 기습 포위를 뚫은 미군의 장진호 철수에 쓰일 말이다. 회복할 수 없는 패전이나 항복을 하느니 일단 후퇴해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는 전례가 될 것이다. 물론 질서 있는 후퇴가 병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 반면 2차 대전 당시 독소 전쟁 전황을 일거에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물러설 수 없는 진지전의 사투를 보여준다. 더 이상의 후퇴는 소련 패전을 의미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볼가강을 뒤에 두고 6개월여간의 처절한 시가전 끝에 소련군이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소련군은 독일의 두 배 이상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 전투가 배경인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는 소련과 독일군 저격수의 싸움을 그렸다. ‘존버’, 끝까지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 저격전이다.
□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최소 규모에 금메달 5개 정도 예상했던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13개를 포함해 32개 메달을 수확했다. 이를 ‘파리의 기적’이라 부른다면 체급 열세와 부상을 딛고 따낸 유도 혼성 단체전 동메달은 인상 깊다. 특히 대표팀 주장 안바울 경기는 만화에서나 나올 만한 내용이다. 6명이 한 팀인 혼성 단체전에서 한국팀 사정상 73kg급 선수와 겨뤄야 했던 66kg급 안바울은 3시간여 사이 벌어진 두 경기에서 정규 시간(4분)의 7배에 가까운 27분40초 사투를 견뎌냈다.
□ 패자부활전에서 한 체급 무거운 우즈베키스탄 선수를 맞아 12분37초 혈투 끝에 반칙승을 거둔 데 이어 동메달 결정전에서 6kg 무거운 독일의 이고르를 맞아 9분38초 만에 절반패했다. 하지만 팀이 극적으로 3-3 동점을 이끈 상황에서 체급 뽑기인 ‘유도 룰렛’에서 73kg급이 걸리며 재대결에 돌입, 이미 체력이 소진된 이고르에게 5분25초 만에 반칙승을 따냈다. 다크서클까지 내려앉았지만 지친 기색도 없었다. 경기 후 긴장이 풀리자 통증이 몰려왔고 새벽엔 의무실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한 편의 스포츠 투혼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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