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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미술, 잔디로 초상화를 그리다

입력
2024.08.08 04:30
수정
2024.08.08 22:03
21면

편집자주

김승민 큐레이터는 영국 왕립예술학교 박사로 서울, 런던, 뉴욕에서 기획사를 운영하며 600명이 넘는 작가들과 24개 도시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미술 시장의 모든 면을 다루는 칼럼을 통해 예술과 문화를 견인하고 수익도 창출하는 힘에 대한 인사이더 관점을 모색한다.


2023년 6월 영국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진행된 '지구에게'(Dear Earth)에 듀오 작가 아크로이드&하비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은 광합성을 조절해 잔디에 색깔을 입히는 방식으로 환경운동가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헤이워드 갤러리 제공

2023년 6월 영국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진행된 '지구에게'(Dear Earth)에 듀오 작가 아크로이드&하비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은 광합성을 조절해 잔디에 색깔을 입히는 방식으로 환경운동가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헤이워드 갤러리 제공

식물은 인간과 예술적으로 교감할 수 있을까?

식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단순히 인간 등 동물의 에너지원으로 활용되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시각, 그리고 인간 삶의 현재성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후자의 시각은 같은 지구 구성원으로서 공존의 존재론적 고찰을 끄집어낸다.

오래전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식물과 인간의 예술적 교감’ 가능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성찰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런 미학적 탐구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예술 영역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기후 변화에 의해 예상하지 못했던 재난이 발생하면서 식물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이런 관심은 자연 생태 영역에 대한 펀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스펜서뮤지엄에서 진행됐던 '큰 식물학'(Big Botany), 2023년 헤이워드 갤러리의 '지구에게'(Dear Earth) 등 식물과의 공감을 주제로 한 전시가 같은 맥락에서 열렸다.

이런 다양한 작업 중, 식물의 경이로운 활동인 ‘광합성 작용’을 예술에 접목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의 작가 듀오 아크로이드 & 하비는 1990년부터 예술과 환경운동을 결합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진을 ‘찍지' 않고 기른다. 먼저, 전시실을 거대한 암실로 만든 뒤 암실 벽면에 씨앗을 바른다. 그리고 빛을 씨앗이 발린 벽면에 비추는데, 이때 빛은 환경 운동가들의 초상화가 찍힌 네거티브 필름을 통해 투과시킨다. 그러면, 필름의 명암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빛이 투과되고, 이 빛에 따라 벽면에서 자라는 잔디 잎의 색깔이 결정된다. 즉, 밝은 빛이 강하게 투과된 부분에는 녹색 잔디가, 적게 투과된 곳에는 노란색 잔디가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잔디 초상화는 강렬하다.

티모시 사바스(Timothy Savas)는 과학자의 길을 걷다가 예술가로 변신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생물계절학 연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씨앗에서 싹이 움트는 형태 변화에 영향을 주는 생화학적 신호는 햇빛에 노출된 ‘시간’ 때문인지, ‘온도’ 때문인지를 밝히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이 연구는 기후 변화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과제였다.

사바스는 수십만 장의 타임랩스 사진을 찍으며 ‘새순’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이후 MIT 미디어융합 기술연구소 케일럽 하퍼 박사팀에 합류해 실내 식물 재배에 필요한 환경 및 에너지 제어 플랫폼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누구나 쉽게 실내에서 채소를 재배할 수 있도록 돕는 ‘푸드 컴퓨터’다.

푸드 컴퓨터는 화성 같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식물 재배에 필요한 이산화탄소량, 온도, 습도, 전기 전도도 등 다양한 요소를 관측하고 제어한다.

윌리엄 다렐의 ‘떨리는 버섯’

윌리엄 다렐의 ‘떨리는 버섯’

문득 작년에 기획한 인도어팜(In-door Farm) 전시가 떠오른다.

흙 한 톨 없는 콘크리트 성 속에서 생명을 키운다는 것, 그리고 이를 예술과 접목한다는 점에서 흥분됐다. 빛, 바람, 꽃가루 매개자 등 식물 성장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작품의 영감이 됐다. 식물 광합성에는 400~500나노미터(㎚) 파장의 청색 빛과 640~700㎚의 적색 빛이 필요하다. 이 두 빛이 섞인 보라색 조명 앞에서 새미 리 작가는 유목(乳木)을 활용해 바람을 표현했고, 마시밀리아노 작가는 태양을 모티브로 조명 작품을 만들었다. 또 윌리엄 다렐 작가는 ‘떨리는 버섯’을 생분해성 플라스틱으로 3D 프린팅을 했다. 작품 설명에는 “3.6억만 년 전, 식물이 갑자기 딱딱한 경질의 나무로 진화했다. 버섯과 같은 곰팡이는 나무를 분해할 수 없었고 6,020만 년 동안 분해되지 않은 나무가 쌓여 석탄이 됐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석탄을 태우며 플라스틱을 만들고 있는 우리와, 플라스틱을 분해할 곰팡이를 연구하는 우리. 이처럼 아이러니한 지금 세상에 진짜 필요한 다음 단계는 아마도 식물과 인간 간의 소통일 것 같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어쩌면 이 때문에 예술가와 과학자가 함께 협력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작금의 생태계 임계점에서 예술, 과학, 기술, 자연의 힘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김승민 슬리퍼스써밋 & 스테파니킴 갤러리 대표
대체텍스트
김승민영국 왕립예술학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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