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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전당이 민란의 거점으로... 어설픈 개발 피한 천년고성

입력
2024.08.10 10:00

<144>영남 광동 ⑥마오밍 두주고성과 윈푸 펑양고촌

마오밍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영성문.ⓒ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영성문.ⓒ최종명

광둥성 서남부 도시 마오밍(茂名)으로 간다. 광저우에서 하루에 60여 차례나 고속철이 출발한다. 정차하는 역이 없으면 약 2시간 걸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철도나 도로가 생기니 대중교통 이용이 갈수록 편리하다. 350km를 순간 이동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 반을 이동해 신이(信宜)의 전룽진(鎮隆鎮)에 도착한다. 500m 정도 걸어가니 홍루라 불리는 문명문(文明門)이 나타난다.

서양식 건축 입은 서원 줄줄이, 두주고성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명문.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명문.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 문명문 아치로 보이는 풍경.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 문명문 아치로 보이는 풍경. ⓒ최종명

당나라 건국 직후 621년에 쌓은 두주고성(竇州古城)이다. 광둥 서쪽을 방비하는 거점이었다. 청나라 순치제 시대인 1656년 성벽을 중건하고 사방에 대문을 설치했다. 1813년 현지 인사들이 대문에 누각을 짓고 이름을 지었다. 문명이 활짝 열리라는 염원을 담았다. 기둥에 ‘만세’가 은은하게 남았다. 문명을 대신해 문화혁명이 휩쓸고 지나갔다. 아치형 문으로 들어서니 초등학교로 사용한 자취가 보인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전룽소학.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전룽소학.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간재서원.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간재서원. ⓒ최종명

서원이 많아 서향팔방(書香八坊)이라 불렸다. 대문 네 곳에 패방이 여덟 개인 마을이었다. 간재서원(簡齋書院)이 보인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 인물 양태기의 호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출중했고 외과의사로 명성을 떨쳤다. 연구개발한 약재와 탁월한 치료로 부를 축적했다. 민국 초기에 후손이 중건했다. 삼민주의자 쑨원의 휘하인 광동성 주석 후한민이 편액을 썼다. 제자(題字)도 명필이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간재서원 내부.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간재서원 내부. ⓒ최종명


내부는 도자기를 판매하는 가게다. 이름도 그럴듯한 도원거(陶源居)다. 간재는 고향의 구휼에 힘쓴 인물이다. 공화주의자 후한민이 이유 없이 지필묵을 들었을 리 없다. 약간 낯이 뜨거워진다. 도예 솜씨는 평범하다. 큰 함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약간 좁다. 관광객이 드나들며 흥정하니 존중은 고사하고 고택의 향기도 사라졌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악요서원.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악요서원. ⓒ최종명

서양식 2층 건물인 서원이 바로 옆이다. 청나라 중기에 처음 세웠다는 악요종사(嶽耀宗祠)다. 분명 서원인데 설명은 양씨 사당이다. 두주고성의 서원은 성격이 애매하다. 저택이고 사당이며 학당이다. 민국 초기에 중건하며 전통에 서양 몸집을 입힌 모양새다.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었다는 설명이다. 악요는 아버지의 자(字)다.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문화혁명 시기 곡물창고로 전락했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육가서원.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육가서원. ⓒ최종명

공안국 간판이 걸린 서원이 있다. 청나라 후기에 조상을 위해 세운 육가서원(陸賈書院)이다. 육가는 한나라 시대에 영남 지역인 남월(南越)에 두 번이나 출정해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건국 초기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대부에 올랐고 한나라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개월대부사(開越大夫祠)라 불린다. 해방 초기에 공안국이 업무 공간으로 사용했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표석.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표석. ⓒ최종명

대홍국왕궁구지(大洪國王宮舊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원나라 시대인 1354년 처음 건축했다. 당시는 학궁(學宮)이었다. 인재를 양성하는 지역 대학이었다. 1850년 태평천국의 민란이 발발한다. 청나라 조정은 도무지 정상이 아니었다. 영남 일대에 천지회(天地會) 민란의 광풍이 몰아친다. 명나라 말기 반청복명(反清复明)을 신념으로 뭉친 비밀결사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진금강이 깃발을 들었다. 남흥왕(南興王)을 자칭하고 대홍국을 건국했다. 학궁은 왕궁으로 변모했다.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대성전. ⓒ최종명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대성전. ⓒ최종명

학궁 영성문(櫺星門)은 왕궁 대문이 됐다. 붉고 누런 빛깔이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덧칠한 모양이다. 낡은 자태에도 광풍이 몰아치던 민란의 깃발이 스치듯 지난다. 천지회의 기원은 명나라 초기 주원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라’는 포부를 신념으로 감싼 조직이다. 주원장 연호가 홍무(洪武)다. 천지회는 곧 홍문(洪門)이고 대홍국이 계승했다. 2년 후 토벌군이 공격해 왔다. 민란의 수장은 투항하지 않는다. 왕궁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대성전ⓒ최종명

두주고성의 대홍국왕궁구지 대성전ⓒ최종명

공자를 숭상하던 대성전은 왕궁이었다. 또다시 세월을 따라서 초등학교였다. 지금은 문이 닫혔으나 역사의 흥망성쇠가 느껴진다. 한족 부흥을 도모한 비밀 조직인 홍문은 연뿌리처럼 갈래가 넓고도 깊다. 만주족의 중원 침탈에 자존심이 상했다. 청나라 시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청나라 가경제 시대에 백련교도는 자금성을 넘어 황제 체포를 시도했다. 청나라 후기에는 전국 곳곳에서 홍문의 후예가 고개를 들었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창궁.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창궁. ⓒ최종명

비밀조직인 삼합회(三合會)나 쑨원의 흥중회(興中會), 장제스가 활동한 청방(青幫)도 일맥상통이다. 모조리 연못 위로 솟아올랐다. 명나라 말기의 정성공을 시작으로 초기 공산주의자에게도 홍문의 피가 흘렀다. 대홍국을 만나니 ‘중화(中華)’의 용트림이 느껴진다. 대성전 앞에 비석이 몇 개 놓여 있다. 비문은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됐다. 정성공과 장제스, 주원장과 진금강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듯하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창궁.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문창궁. ⓒ최종명

학궁 옆에 3층 누각 문창궁(文昌宮)이 있다. 유교인 듯하나 민간신앙에서 데려온 도교 신이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699년에 지었고 중건이 잦았다. 청나라 후기에 서양식 양식을 입혔다. 두 양식의 장점을 살린 중서합벽(中西合璧)이란 자랑은 단점이기도 하다. 어정쩡한 모습이다. 노란 건물이 불에 탄 듯 검다. 민국 시기 교육관이자 오락 장소였다. 해방 후 의회의 사무실로 사용했다. 새로 글씨를 쓰려고 ‘마오주석만세(毛主席萬歲)’는 지웠다. 건물은 시대에 따라 용도가 자유자재로 변한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기봉서원.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기봉서원. ⓒ최종명

약진문(躍進門)을 적은 기봉서원(起鳳書院)이 있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712년에 세웠다. 1840년 과거시험장으로 중건했다. 과거를 통해 수재를 뽑는 시험장이 고붕(考棚)이다. 거적자리로 둘러쳐 지은 막이란 뜻이다. 수재는 성 단위 시험장인 공원(貢院)에서 과거를 치러 거인(舉人)이 된다. 수도에서 치르는 회시(會試)를 통과하면 진사(進士)다. 청나라 시대에 모두 10명의 진사, 70명의 거인을 배출했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연꽃.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연꽃.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바나나.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바나나. ⓒ최종명

천년고성은 현대판 관광지로 고치지 않았다. 대체로 무채색이고 삭막한 공간이다. 주민도 많이 살지 않는다. 고성 동쪽과 서쪽으로 샛강이 흐른다. 자그마한 호수가 몇 군데 있어 정서가 매정하지는 않다. 보랏빛 감도는 연꽃이 피었다. 바나나도 설익은 채 초록의 옷을 입었다. 한 바퀴 도는데 코끝이 향긋하다. 자연이 고성을 예쁘게 감싸고 있다.

마오밍 두주고성의 ‘전룽의 기억’을 그린 담장. ⓒ최종명

마오밍 두주고성의 ‘전룽의 기억’을 그린 담장. ⓒ최종명

2014년 화가 저우보가 화보집 ‘전룽의 기억(鎮隆記憶)’을 발간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묘사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이름난 경치와 유물을 수묵화로 그려 유명하다. ‘사생(寫生)’이란 담장에 누군가 저우보의 그림을 모사했다. 그냥 벗겨졌는지 먹물로 뿌렸는지 원형은 짐작하기 어렵다. 고성에 대한 설명도 글자가 많아 그림은 사라졌다. 담장 너머 구름과 하늘이 산뜻하다. 기억은 추억한 만큼 살아난다. 두루 느리게 돌아다닌 반나절이다. 고성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으면 좋겠다.

한나라 재상의 가풍 이은 펑양고촌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표지석.ⓒ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표지석.ⓒ최종명

신이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동북쪽으로 100km를 달린다. 광둥성 중서부에 위치한 윈푸(雲浮)시의 뤄딩(羅定)에 도착한다. 5세기 남북조 시대부터 상주(瀧州)라 불렸다. 영남을 흐르는 주요 지류인 상강의 요지다. 남방 불교가 부흥한 지역이다. 송나라 이후 영남의 정치와 군사, 경제 중심지였다. 광둥성이 관리하는 펑양고촌(鳳陽古村) 표지석이 보인다. 대문도 패방도 보이지 않는다. 도로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 ⓒ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 ⓒ최종명

영남의 12월 한낮은 여름처럼 햇살이 따갑다. 습기가 많아 마냥 편하지 않다. 인적 드문 마을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다. 16세기 명나라 시대 형성된 마을이다. 새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한적한 마을이다. 하늘이 푸르니 기분만큼은 상쾌하다. 광장 옆에 진씨종사(陳氏宗祠)가 있다. 19세기 초 청나라 가경제 시대 건축됐다. 진씨 집성촌이다. 3칸 크기로 두 채인 종사다. 오색 깃발과 연등이 휘날리고 있다. 사당 자체는 몹시 낡은 모습이다.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최종명

정문에 걸린 홍등도 너저분하다. 덕지덕지 붙은 ‘쌍 희(囍)’도 산만하다. 진황세유(陳皇世胄)와 한상가풍(漢相家風)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진씨가 황제에 등극한 역사가 있던가? 생각해보니 있다. 6세기 남조 시대의 마지막 왕조인 남진(南陳)이다.

진무제(陳武帝) 진패선(陳霸先)의 후대라는 자랑이다. 재위기간이 2년 남짓이었어도 황제였다. 한나라 시대 재상의 집안이라 내세우면 대부분 소하(蕭何)다. 진평(陳平)도 있다.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이며 정치가다. 승상을 역임하며 한나라의 기틀을 닦은 일등공신이다. 소하보다 못하지 않다. 한나라 재상의 가풍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의 신위.ⓒ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진씨종사의 신위.ⓒ최종명

펑양진씨 시조는 명나라 시대에 이주한 진빈(陳賓)이다. 제단 뒤로 신위가 수없이 놓였다. 봉황이 비상을 노리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털도 빠지고 다리도 날개도 보이질 않는다. 소나무는 싱그럽고 태양은 붉다. 양쪽 벽에는 용이 불을 뿜으며 승천하려는 듯하다. 진씨 집안도 춘사추상(春祀秋嘗)한다. 봄에 제례를 지내고 가을에 추수 의식을 치른다. 1년에 최소한 두 번 모인다 하는데 허름하게 보인다. 가문의 영광이 중요한 세태가 아니니 탓할 필요는 없다.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 ⓒ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 ⓒ최종명

청나라 시대 민가 30여 채가 보존돼 있다. 골목이 나란히 일곱 군데다. 미로 같은 길을 요리조리 걷는다. 민가 담장에 마름모꼴로 ‘공자 말씀’을 하나씩 적었다. 관용을 뜻하는 용(容)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수많은 하천을 받아들이는 바다인 해납백천(海納百川)이 적혀 있다. 관용이 부족하면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따른다는 역이충언(逆耳忠言)도 귀담아듣는다.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 ‘오’에 대한 메시지. ⓒ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 ‘오’에 대한 메시지. ⓒ최종명

오(悟)도 있다. 남이 한 말(牙慧)을 듣지 않고도, 규칙(成規)을 보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시구인 심유영서일점통(心有靈犀一點通)이라 썼다. 전설 속에 나오는 서우의 뿔을 비유한다. 뿔과 뿔 사이 가느다란 선이 이어져 있어 감응에 예민한 동물이다. 깨달음이란 말이나 법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타고난다는 뜻인가? 눈만 마주쳐도 통하는 사이, 만나는 일이 어렵긴 하겠다. 평생에 마음 맞는 소 하나 없겠는가?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골목.ⓒ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민가. ⓒ최종명

윈푸 뤄딩의 펑양고촌 민가. ⓒ최종명

골목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뜻밖에도 마오쩌둥을 그린 민가 담장이 많다. 알고 보니 항일 전쟁 시기 국민당 군대 중 하나인 19로군(十九路軍)이 거주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대가 상하이를 급습했다. 이에 군대를 정비하고 항전하던 시기다. 광둥 출신 장광나이를 총대장으로 하는 19로군 부대가 머물렀다. 항일 시기와 해방 이후 문화혁명을 거치며 현대사의 질곡으로 더 이상 거주 공간이 아니다. 이제 유물이자 관광지로 남을 뿐이다. 국민당이 물러간 자리에 문혁의 아픈 함성이 머물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을 지닌 마을, 발품으로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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