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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올림픽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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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시작한 지는 10여 년이 훌쩍 넘지만 열심히 한 건 한 3년 정도 됐다. 나이도 들어가고 코로나19 때 영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 탓까지 겹쳐 목과 어깨가 굳더니 두통까지 심해졌다. 하던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몇 개 병원을 돌아다니니 머리를 쓰는 연구자로 계속 살아가려면 몸부터 잘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부터 수영도 배웠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자로 살 수 없다는 공포가 더 컸는지 생각보다 쉽게 극복했다. 수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후에는 해 보고 싶은 스포츠가 더 늘었다. 올해 크로스핏을 시작한 뒤로는 근육량을 늘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파리 올림픽은 ‘생활 운동인’이 된 뒤 처음 맞이한 올림픽이다. 사실 올림픽 같은 메가스포츠 이벤트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젊고 건강한 남성 육체의 능력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도 별로였고 거기에 ‘국뽕’ 정서를 투사해 울고 웃으며 집단주의적 일체감을 맛보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생활 운동인이 되고 나서 보게 된 올림픽 중계방송은 사뭇 다른 쾌감을 선사했다. 수영이 영법 수행, 근육의 움직임, 속도의 조화가 참으로 역동적인 운동이라는 걸 수영을 배우기 전에는 몰랐다. 양궁과 사격 선수들의 고요해 보이는 얼굴이 실은 온 마음과 근육을 집중시킨 상태라는 것도 훨씬 눈에 잘 들어왔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몸과 마음의 다르지 않음이 흥미진진하다.
차라리 아주 어렸을 적에는 몸과 마음이 일치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네뛰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우리집에 왜 왔니, 오징어 게임, 철봉놀이… 매일매일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느낀 다채로운 마음의 상태들, 조바심, 경쟁심, 기쁨, 행복감, 만족감이 생생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함께 뛰놀던 일상이 막을 내리게 된 건 여자아이들의 가슴이 봉긋하게 나오고 월경이 시작된 직후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남자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내보낸 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여자아이들만 남은 그 교실에서 우리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과 월경대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깨끗하게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그사이 남자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2차 성징 즈음해서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는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골칫덩어리라는 거였다. 반대로 남자아이들은 최대한 겁 없이 몸을 쓸 줄 알아야 했다. 운동을 잘하는 남자아이와 운동에는 관심 없는 조신한 여자아이. 그렇게 우리는 젠더 질서 속으로 입성했다.
이런 사회에서 ‘월경을 하는 몸’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하는 몸’은 ‘운동하는 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 탓에 어린 여자 선수들은 월경 주기에 따른 여러 신체적, 감정적 변화를 드러내기 어렵다. 임신과 출산을 한 여자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여자치고 잘 뛰네'는 미국을 대표하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로런 플레시먼(Lauren Fleshman)의 자전적 에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활약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미국의 육상 여자 선수들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에스트로겐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월경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던 상황을 실감나게 서술한다. 결국 섭식장애를 불러오는 혹독한 다이어트를 통한 무월경 상태의 유지는 골다공증으로 이어져 골절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섭식장애, 무월경, 골다공증은 현재도 많은 여자 선수가 겪는 세 가지 문제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2018, 2019년 무렵 다양한 대중 콘텐츠에서 운동하는 여성들이 화제가 되었을 때 월경이 언급되고는 했다. 그러나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의 월경 경험 에피소드 정도에 그쳤다. 월경이 여성인 몸을 원망하게 만드는 장애물인 이유는 실제로 월경이 운동 능력을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 아니다. 월경 주기에 따른 호르몬 변화를 격심하게 겪어야 하는 여성의 몸이 건강한 상태로 운동을 하고 그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려와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21세기가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인류가 연구하고 배울 가치가 있는 ‘운동하는 몸’의 이상은 여전히 월경 따위 하지 않는 남성의 몸인 것이다.
스포츠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몸이 젊고 건강하며 장애가 없는 남성의 몸이기에 운동하는 여성들은 자주, ‘지나치게 남성적인’ 여자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은 여자 선수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은 1972년 스포츠를 포함한 학교 교육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법인 타이틀 나인(Title IX)이 통과된 후 법제도적 보완을 통해 이를 지켜가고 있는 나라다. 그런 미국에서 1990년대 가장 흔하게 발생했던 여자 선수들에 대한 괴롭힘이 바로 ‘레즈비언’이라는 명명과 공격이었다. 여자 운동선수들은 남자가 필요 없는 레즈비언일 것이라는 편견에 기반한 혐오 공격이었다. 1997년 하버드대학에서 발행한 ‘하버드 게이 앤드 레즈비언 리뷰’는 "여자 스포츠 홍보자들이 여자 경기에서 레즈비언 이미지를 씻어내려고 애쓰고" 있으며 "스포츠에서 여성이 설 자리를 위해 오랫동안 힘겹게 투쟁한 레즈비언들, 그리고 레즈비언으로 불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여자 선수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셰리 보셔트 지음, 노시내 역, '타이틀 나인' 참고).
성소수자 차별이 심각한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고교 시절 학교 테니스부의 에이스였던 내 친구는 여학생들의 관심과 남자 코치의 ‘레즈비언’ 의심이 모두 부담스러운 나머지 운동을 그만둬 버렸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친구가 ‘테니스를 잘 치는 여자’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만 있었어도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드러난 스포츠계 인권 침해 사건들과 2019년 이후 스포츠계 미투 폭로 사건들 중에서는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로 지목하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2021년 안산 선수에 대한 관중 폭력 사건 또한 국가대표 여자 선수의 개인적 언행과 헤어스타일을 ‘올바르지 못한 여자=페미니스트’라는 틀 내에 가두고 이를 벌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혐오 공격이다. 이는 여자 운동선수들이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젠더 이원 규범(남자는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복장과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복장과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이원화된 일상적 규범을 뜻한다)을 벗어난 존재라고 여기면서 젠더 이원 규범을 다시금 각인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남자의 몸과 남성성을 최고로 치는 경쟁적 스포츠계 문화는 남자 선수에 대한 성폭력이 벌어지는 토양이기도 하다. 2000년대 스포츠계 인권 침해 사건 보고서들은 남자 지도자와 선배가 선수와 후배에게 행하는 폭력 및 성폭력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위계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거나 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이런 폭력 사건들이 지금도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적극적인 관심과 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성평등 올림픽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내용인즉슨 남녀 선수가 동수로 출전했고 엄마 선수들을 위한 어린이집이 최초로 설치되었으며 여자 마라톤이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은 동등하게 경기할 권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평등은 모두가 그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스포츠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번 올림픽이 그러한 시작이 될지 남은 기간 동안 지켜보는 것도 파리 올림픽을 즐기는 한 방법일 것이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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