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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브로커, '사기꾼' 말고 '남북한 사이에 길을 내는 경계인'으로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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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무수한 경계. 보수와 진보, 장애와 비장애, 이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다양한 성적 취향. 뚜렷하고 명확하다고 여겨지는 경계들을 조금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 경계의 안팎을 가르는 명쾌함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은 명확한 물리적 경계를 두고 남과 북으로 갈린 나라다. 수십 년간 적의로 쌓아올린 시간은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연극 '당연한 바깥'은 견고한 듯 보였던 남북을 가르는 경계가 여기저기 균열된 선이자 뭉개진 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한 여성 탈북 브로커(강지은)가 만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대중매체 속 브로커가 대부분 탈북자의 희망을 이용해 등골을 빼먹는 사기꾼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당연한 바깥’의 브로커는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탈출을 돕는다. 그가 이 일을 사명감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통해 더 많은 사적 이익을 취하길 원하는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다른 데 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경계를 뚫고 작은 길을 내는 이유는 그 역시 탈북자로 이쪽과 저쪽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하는 균열된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곳에도 정주하지 못한 채 경계에 있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경계에 길을 내 사람을 이동시키는 브로커의 일에는 위험과 복잡한 관계가 작용한다. 그간 탈북민들의 이야기가 피상적으로 그려졌다면, 연극 ‘당연한 바깥’은 꼼꼼한 리서치를 통해 삶의 질감이 느껴지는 생생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작품 속 브로커는 한국전쟁 포로의 탈북을 유도하라는 남한의 제안을 받는가 하면, 탈북시키려던 청년이 중국 공안에 잡혀 제3국인 라오스로 쫓겨나면서 북한과 남한, 그리고 라오스 간 외교적 역학관계의 자장 안에 놓이기도 한다. 탈북하거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개개인들의 수십 년의 역사는 정치·외교 등 외부적 요인과 함께 첩첩이 쌓여 있다. 탈북자와 브로커의 이야기에는 한국 근현대사 갈등과 주변 국가들의 역사적 관계가 녹아들어 있다. 견고한 벽으로 알았던 분단의 경계는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개개인의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균열이 나고 틈이 생겼다. 탈북자의 몸이 경계를 넘기 훨씬 전부터 분단의 상처를 지닌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바람을 타고 구름이 돼 그 경계를 넘어왔다. 브로커는 그 오랜 마음의 길을 열어 줬을 뿐이다.
해방 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한 지 70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탄생하고 사라질 만한 시간이고, 두 세대가 태어날 시간이다. '당연한 바깥'은 경계와 무관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관객에게 여전히 역사의 진앙이 우리 삶을 흔들고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브로커는 지진을 예민하게 느낀다. 지진은 이념과 분단의 역사를 공유하는 이들의 아픔에 대한 은유다. 진앙 거리에 따라 강도는 다르겠지만 분단 경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동일한 역사의 단층 안에 놓여 있는 관객들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이지만 억지로 갈라놓은 경계인들의 이야기는 보편적 성찰에 이르게 한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편히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남측 요원으로 오직 임무에만 충실했던 서진(김효진)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조사관에게 실토한다. 분단의 역사는 경계를 만들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여진을 일으켰고, 그 진동은 경계와 무관하게 살아온 관객조차 미세하게 흔든다.
연극은 메인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마주보게 하고 객석 뒷길도 무대로 활용해 남북을 오가는 브로커의 이야기 속에 관객들을 위치시킨다. 경계에 머무는 탈북민과 브로커의 삶이 관객과 동일한 단층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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