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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 뇌물받은 심사위원의 명언... "일해서 돈 버는 시대는 끝났다"

입력
2024.07.30 14:28
수정
2024.07.30 21:3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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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감리 담합 수사결과 발표]
교수, 공무원, 공사직원 무더기 기소
여러 업체 상대로 '뇌물경매' 걸기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의 모습. 이한호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의 모습. 이한호 기자

약 6,000억 원 규모에 이르는 담합행위를 일삼고, 사업 낙찰을 대가로 뇌물을 주고받은 감리 심사위원과 업체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교수와 공무원 등은 여러 업체를 대상으로 누가 뇌물을 더 주는지 경쟁을 시키거나, 자기 업무를 심사 담당 업체 직원에게 떠넘기는 등 최악의 도덕성을 드러냈다.

30일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 김용식)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한 아파트 건설사업관리용역(감리) 담합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대학교수, 공무원, 업체 대표, 법인 등 68명을 뇌물수수·뇌물 공여·공정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 따르면 국내 감리업체 17곳은 2019년 10월부터 2023년 2월까지 LH 발주 용역 79건, 조달청 발주 용역 15건 등 총 5,740억 원(낙찰금액 기준) 규모 사업에 대해 부당공동행위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정부가 기존 최저가 낙찰제의 폐해를 막고 기술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2019년 종합심사낙찰제도를 도입하자, 기술 경쟁 대신 담합을 선택했다. 전국 각지의 공공·임대 아파트, 병원·경찰서 등 주요 공공건물 감리 입찰에서 지속적 담합이 이뤄졌다. 이들은 LH가 공지한 연간발주계획을 기준으로 낙찰 업체를 지정해 나누고, 서로 들러리를 서는 등의 방법으로 담합을 진행했다. 2020년에는 전체 감리 사업의 약 70%를 이들 업체끼리 나눠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뇌물 수수 심사위원이 주거지 화장품 상자 안에 넣어두고 보관하던 현금 약 1억 원. 서울중앙지검 제공

뇌물 수수 심사위원이 주거지 화장품 상자 안에 넣어두고 보관하던 현금 약 1억 원. 서울중앙지검 제공

감리업체들은 심사위원을 대상으로 전방위적 로비를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심사의 공정성 제고를 위해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자 이를 악용한 것이다. 업체들은 심사위원 풀(pool) 명단을 확보해 각 위원과 인연이 있는 직원을 담당으로 배정, 평소부터 향응을 제공하는 등 로비에 회사 역량을 총동원했다. 심사위원 선정 당일에는 미리 해당 지역에 영업사원을 보낸 뒤, 선정 발표 직후 금품을 건네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로비가 이뤄졌다. 이들은 심사위원들이 로비 업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제안서에 '상상e상' '불만제로' 등 특정 문구를 삽입하기도 했다.

대학교수, 시청 공무원, 공사 직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도 적극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이들은 로비 업체끼리 경쟁을 붙여 더 많은 뇌물을 요구하거나, 여러 업체로부터 동시에 돈을 받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쟁업체에 가장 낮은 점수(속칭 '폭탄')를 주고 기존 뇌물에 웃돈을 얹어 받은 이도 있었다. 이번에 재판에 넘겨진 심사위원 18명이 2020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받은 금액은 총 6억5,000만 원에 달했다.

심사위원 도덕적 해이 사례. 서울중앙지검 제공

심사위원 도덕적 해이 사례. 서울중앙지검 제공

한 심사위원은 "여행 가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며 문자메시지로 뇌물 수수 사실을 아내에게 공유해 검찰에 덜미를 잡혔다. 그는 "상품권도 받고, 주유권도 받고, 좋다"거나 "이제 일해서 돈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 앞으로 (정년이) 9년 8개월 남았는데 죽으라고 심사하고 돈 벌어야지"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 밖에 업체 직원에게 차량 운전을 시키거나, 자신이 맡은 기술자문 업무를 떠넘긴 심사위원도 있었다.

이 같은 감리업계 비리는 부실시공으로 이어졌다. 실제 지난해 4월 지하 주차장 붕괴사고가 발생한 인천 검단 아파트(GS건설 등 시공)는 감리 입찰 당시 담합이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2022년 1월 붕괴사고가 발생한 광주 화정아이파크 아파트에도 카르텔 업체 가운데 한 곳이 감리를 맡았다. 수사팀 관계자는 "지속적 담합과 뇌물 범죄로 공공재원이 로비자금으로 흘러가고, 전반적 현장 감리 부실과 안전사고로 이어진 부정부패 사건"이라며 "철저한 공소유지로 공정거래 질서를 저해하는 카르텔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이 LH 감리 담합 사건을 수사하는 11개월 동안 사건 관계자 네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수사팀 관계자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가족분들에게 너무 송구스러운 마음"이라면서도 "(범행 문건이 대부분 파기된 상황에서) 1만2,000개의 음성 녹음 파일 등 추가적인 증거를 확보, 검증해가면서 수사를 진행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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