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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대인기피증에 추락한 자존감…'똑똑했던 나' 되살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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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취업 준비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대학 시절 좋지 않은 일을 당한 뒤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고 성격도 망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재능을 다시 살리고 싶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저는 성격이 밝고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아이였어요. 평화롭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달라졌습니다. 아버지에겐 성격 문제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고등학생 때 엇나가서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하셨대요. 그래서 자격지심이 컸어요. 야망은 큰데 현실에서 충족이 되지 않으니 가족 탓을 했어요. 가족을 때리기까지 하면서 자존감을 확인한 거죠. 매일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자인 저를 유난히 심하게 때렸습니다. 사춘기여서 반항한다는 이유로요. 매일 밤이 무섭고 공포스러웠어요. 빨리 어른이 돼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독하게 공부만 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참았습니다. 어머니는 바보 같다 싶을 정도로 착하셔서 그런 상황에 대해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요. 저에게 공감은 잘 못 해주셨지만 언제나 다정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동생이 삐뚤어지지 않고 자란 듯합니다.
가정 학대 속에서 저는 사회성을 잃어버리고 소심해졌습니다. 늘 주눅이 들고 자존감도 낮았어요. 대학에 가서도 매일 악몽을 꾸고 생각이 멈추지 않는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이제는 힘들었던 기억을 다 잊었어요. 아버지가 가정적으로 바뀌면서 집도 평화로워졌고요. 아버지와 화해한 뒤론 매일 꾸던 악몽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똑똑하고 매력 있고 공부도 엄청 잘하는 아이였지만 융통성이나 사교성은 없었습니다. 성격이 크게 바뀐 건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수업 때 발표를 너무 잘해서 칭찬을 많이 듣고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올 정도로 인기도 많아졌어요. 그전엔 자존감 낮고 소심했는데 갑자기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았고 자존감도 높아졌죠.
그러던 중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학교 학술 동아리에서 외모 꾸미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고 술 좋아하고 남자만 밝히던 여자 아이 셋이 저를 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와 ‘썸’을 타던 남자아이는 그 애들 때문에 저를 오해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를 조롱하는 글을 올렸죠. 때마침 다른 남자아이와 가까워졌는데, 그걸 안 동아리 3인방이 저를 더 괴롭혔고 남자 선배 한 명도 저를 공격하며 괴롭혔습니다. 그들 말고도 여러 사람이 저를 괴롭혀서 너무나 힘들었어요. 자면서도 손이 벌벌 떨릴 정도였죠. 대인기피증에 걸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도 받았습니다. 원래 기억력이 너무 좋아 문제였는데 방금 전에 벌어진 일도 기억을 잘 못하게 됐고 판단력도 흐려졌어요. 책을 봐도 글자가 안 보이니 공부도 할 수 없었죠.
저는 그래도 버텼습니다. 힘든 시간이 지나면 곧 좋은 시간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요. 예전에 제가 잘했던 것, 성취했던 것, 제 진심이 통했던 것들을 떠올렸어요. 하지만 쉽지 않네요. 그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도 자존감은 여전히 바닥이고 취업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도 제대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인복이 없을까' 하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죠. 지금도 기억력이 회복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꾸 실수를 하게 돼요. 죄송스럽고 자존감도 계속 떨어집니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치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전의 제 재능을 다시 살리고 열정 넘치던 시절의 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김수빈(가명∙28∙취업준비생)
수빈씨가 10대 시절 가정폭력 속에서 겪었을 어려운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가족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억압적인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다행히 지금은 가정이 평화로워졌다고 하셨지만, 어릴 때 겪은 가정폭력의 상처는 단순히 관계 회복만으로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시간과 무관하고 언제든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빈씨에겐 예전의 재능을 다시 찾는 것보다 제대로 된 자존감부터 갖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듯합니다. 수빈씨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자존감에는 3가지 요소가 있는데, 자기 조절감, 자기 안전감, 자기 효능감입니다. 자기 조절감이란 내 감정이나 행동을 내가 조절하며 주도할 수 있다는 느낌입니다. 자기 안전감은 자신이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효능감은 자신이 어떤 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조절감과 자기 안전감이 충분히 있어야 자기 효능감이 발휘되는데, 많은 분들이 자존감을 이야기할 때 자기 효능감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표면적인 것만 중요시하고 근본적인 걸 보지 않는 거죠. 자기계발서에서도 자기 효능감에만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능력이 있어서 뭔가를 성취하면 자존감이 생길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그건 잘못된 인식입니다. 세 요소가 균형이 맞지 않으면 자존감은 무너질 수 있어요. 자기 효능감으로만 느끼는 자존감은 상황에 따라 급변할 수 있기에 진짜 자존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존감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건 수빈씨도 자기 효능감에만 몰두하는 게 아닐까 해서입니다. 나머지 두 요소를 무시하다 보면 계속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자기 효능감에만 더욱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자기 효능감이 자존감의 한 요소로서 충분히 역할을 하려면 자기 조절감과 자기 안전감도 꼭 필요합니다.
사람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낮아지게 됩니다. 수빈씨는 10대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자기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게 됐을 겁니다. 감정을 조절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폭력을 경험하고 공감을 받지 못하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게 됩니다. 억압을 당하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없어요. 고교 시절 수빈씨가 공부에만 집중했던 건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분위기에 대해 반응했던 것일 수 있어요.
자존감의 세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안전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 안에서 안전한 느낌을 받아야 해요. 가족은 내 편이라는 느낌이죠. 그런 느낌이 있어야 자기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면서 자기 조절감이 생기고 자기 감정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공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면 자기 안전감을 느끼기 어려웠을 거예요.
결핍이란 건 단순히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느낌이 없으면, 나 자신이 보잘것없게 여겨지고 마음 깊숙한 곳에 수치심을 간직하게 됩니다. 사람에겐 유대감·친밀감·애착에 대한 욕구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게 결핍되면 지속적인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조절감과 자기 안전감이 훼손되기에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어요.
수빈씨가 지금 자존감이 낮다고 느끼는 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전감과 자기 조절감이 부족한 탓이 더 큽니다. 수빈씨가 언급한 결핍은 이 두 가지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인식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서 대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수빈씨는 재능 회복에만 집중하면서 자기 효능감만 추구하게 된 걸로 보여집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런 결핍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따져 보면서 관련된 감정들을 찾아봐야 합니다. 자기 조절감과 자기 안전감이 회복되면 수빈씨의 능력도 잘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저에게 상담할 내용을 쓰면서 치유되는 걸 느꼈다면 감정일기를 써보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마구 써보세요. 내 마음 안에 있는 감정, 부모에 대한 감정, 주위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편하게 쓰다 보면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래야 자기 조절감이 조금씩 회복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조금씩 맺으려고 노력해 보세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 내 편이 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됐다면 부모가 내 편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경험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안전감이 조금씩 생깁니다. 다만 부모님과 과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해결하려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누구든 죄책감과 관련된 기억들은 왜곡하거나 삭제하기 쉽기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수빈씨가 오히려 더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수빈씨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나누고 이야기해 보세요.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고 불쌍했는지를 직면하고, 과거를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라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대면해야 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무너진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될 것입니다. 수빈씨가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면서 안전감을 느끼며 자신의 재능을 펼치게 되길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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