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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의 '데시에르토 플로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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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이어지는 장마 사이, 슬쩍 얼굴을 내미는 파란 하늘. 비 개인 후에만 만날 수 있는 선명한 파란색에 투명한 물기를 머금은 새하얀 구름까지 뭉게뭉게. 출근 시간에 허겁지겁 나서던 이들도 슬며시 휴대전화를 꺼내 찰칵, 사진을 찍어 둔다. 간만에 얼굴을 내민 파란 하늘 덕에 칙칙한 도시인들 표정에도 잠시 화색이 돌았다.
장맛비가 쏟아지니 아파트 외벽에서 물이 샌다는 세입자의 연락에 가슴이 철렁한 터였다.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공사라, 2~3일은 바싹 말라야 벽과 창틀 사이 틈새를 메우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데. 줄곧 비 모양만 그려진 일기예보를 보면 8월까지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라 애가 타고 있었다.
"오려면 확 오고 말지, 찔끔찔끔 구질구질하게." 잔뜩 찌푸린 장마철 하늘에 대고 한 소리 하며 지나가는 청년도 괜스레 섭섭했다. 하긴 나 역시도 가뭄이라는 말이나 태풍이라는 말이나 그냥 스쳐 가는 뉴스였을 뿐이니. 농부가 아니라는 핑계로 그간 무심했던 날씨가 내 사정이 되니 달라졌다. 비가 오나 안 오나 내내 하늘만 쳐다보게 되는 이 얄팍한 마음, 사람이 이리도 간사하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도 때아닌 폭우가 내렸나 보다. 안데스산맥이 습한 바닷바람을 가로막아 비가 내리지 않는 '비그늘' 지역인 데다, 차가운 해류가 흘러 비구름 형성에 필요한 저기압대가 만들어지지 않는 매우 건조한 사막인데, 엘니뇨 현상으로 7년 치 비가 한 번에 내렸단다.
남아메리카의 서부 해안을 따라 1,600㎞나 이어지는 아타카마 사막의 연평균 강우량은 15㎜가량. 그 넓은 땅의 대부분이 바싹 마른 돌과 모래다. 바람에 깎이고 남은 지형이 달 표면을 쏙 빼닮은 협곡인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은 화성 탐사를 떠나기 전에 시운전을 해보는 실험 장소였을 정도다. 아무것도 자랄 것 같지 않은 황무지를 걷다 보면 지구가 아닌 행성에 홀로 버려진 듯한 착각마저 든다.
하나 이 메마른 사막에도 반짝이는 것들은 숨겨져 있다. 맑고 건조한 남반구의 고지대라는 최상의 입지 조건 덕에 세계적인 천문대가 사막 곳곳에, 구름 끼고 비 오면 관측 자체를 접어야 하는 천문학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연구 환경은 없다.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공해도 없으니, 사막에 깃든 여행자의 머리 위로는 긴 밤 내내 별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꽃을 피우는 사막 씨앗도 숨어 있다. 어쩌다가 강우량과 기온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면 잠들어 있던 씨앗들이 발아해 척박한 사막을 희고 붉은 꽃들로 뒤덮는데, 십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희귀한 현상인 데시에르토 플로리도(Desierto Florido)다. '꽃이 만발한(Florido)' '사막(Desierto)'이라는 참으로 반어적인 두 개의 단어가 하나가 되는 순간! 남반구에서는 한겨울인 7월에 갑작스레 내린 폭우가 퍼석퍼석한 사막에 뜻밖의 꽃들을 피워냈다.
비가 잔뜩 온 탓에 비 갠 후의 새파란 하늘이 더 반갑긴 했지만 그래도 오는 비 따라 더 큰 걱정들이 쏟아지는 요즘. 물처럼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도 없구나 싶다. 부디 두루두루 무탈하게 이번 장맛비도 지나가시길, 딱 메마른 땅에 희고 붉은 꽃을 피울 정도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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