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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높은 ‘한국어 대사전’을 바라며

입력
2024.07.17 19:00
25면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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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은 온갖 외래어나 전문용어, 고유명사까지 다 들어가서 비판도 받는다. 한국에서도 거의 안 쓰지만 세계 어느 사전에서도 찾기 힘든 말도 꽤 있어서 재밌다. 측면결혼(側面結婚)이라는 희한한 말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에서 시행한 결혼 정책. 인구 증가의 비상수단으로, 남편이 출정 중인 부인을 남편의 승낙을 얻어 일시로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하던 일"이다.

과연 이런 정책이 있었을까 싶은데 내용만 봐도 앞뒤가 잘 안 맞는다. 20세기 초엽에야 유럽도 대개 그랬지만 성윤리 면에서 독일은 꽤 보수적이었고,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근대국가로서 사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할 만큼 막장도 아니었다. 또한 여자는 남편이 전사할지도 모르는데, 따로 낳은 애를 혼자서 키운다? 남자는 살아 돌아온다면 피 안 섞인 애를 같이 키운다?

물론 전시 상황이라 부부가 흩어지니 혼외 관계를 맺은 경우도 늘었으나 인구 증가에 유의미하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난리통에 애가 확 늘면 가정 살림도 어렵고, 병력으로 바로 쓸 수도 없는 정부로서도 부담만 짊어질 텐데 억지스럽게 혼외 출산율까지 높이는 정책을 펼 리도 없다. 경제적 곤란, 육아부담, 개인주의, 여성의 사회참여 등 여러 현대적 이유로 당시도 독일은 출산율이 높지 않았기에 출산 정책도 폈고 사생아에게도 관대해졌으나 전시에 아이를 낳기란 누구든 부담스러워 잘 되지 않았다.

그런 황당한 정책이야 없었고 혼외 관계를 일컫는 독일어 표현이 일본에서 와전된 듯싶다. '내연, 사실혼, 축첩'의 옛말 Nebenehe[네벤에에: 옆에서 결혼]도 있고, Seitensprung[자이텐슈프룽: 옆으로 팔짝 뜀]은 '바람, 불륜, 외도'를 뜻한다. 영어 a bit on the side도 옆에 둔 '불륜 상대'를 일컬어서 비슷하다. 독일어 신문, 잡지, 책, 백과사전, 언어사전 어딜 뒤져도 없는 '측면결혼'은 일본 隠語大辞典(은어대사전)에만 '남편이 아내의 승낙을 얻어 첩을 두는 것'이라 나온다. 그런 행위 자체야 왕왕 있었겠지만 많이 쓰던 은어 같진 않고 지금은 거의 안 쓴다.

표준국어대사전 항목의 출처는 20세기 초 몇몇 일본 사전과 1946년 민조사(民潮社)에서 펴낸 신어사전(新語辭典) 등이다. 용어로서 뚜렷한 근거가 없으니 은어로서 말고는 이후 일본 사전들에서 빠졌다. 한국에서도 일부 사전에만 나오던 말인데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자들이 몸집만 불리려고 욱여넣다 보니 배탈이 났다. 국어사전은 이런 황당한 측면이 더 흥미롭다. 다행히 고려대한국어대사전 표제어로는 없다. 언젠가 새로 나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빠질 이런 말들을 따로 추려서 살펴봐도 재미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주요 서양 언어의 대사전들은 어원과 수백 년에 걸친 의미 변천, 용례가 상세히 나온다. 딴 유럽 언어들도 그만한 대사전을 보유하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어나 일본어가 이에 미친다. 한국어는 이게 안 돼서 좀 아쉬운데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훈민정음 창제부터 따지면 얼추 600년이 돼가는 셈이지만 19세기까지 주요한 문서나 서적이 한문이었기에 자료가 적고 연구 역사도 짧다. 수준 높은 대사전은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기에 손꼽을 만한 언어들만 보유한다. 스웨덴어 대사전은 지난해 130년 만에 완성됐다. 우리도 성급하게 굴기보다는 좀 더 참을성을 가지고 꾸준히 매진해야 할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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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식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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