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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녹음 기술 최고 수준인데 'LP 음반 디깅족'은 왜 늘었을까

입력
2024.07.14 16:30
20면

[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시간을 붙잡아 두게 하는 '아날로그 오디오 문화'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며칠 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지역 문화예술교육센터에 다녀왔다. 음악을 듣고, 음악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한구석엔 ‘음악의 온도’라는 주제로 바이닐 레코드(LP) 커버가 전시돼 있고, 턴테이블로는 전문가가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를 감상할 수 있다. 음악 서적 옆에는 종이와 연필을 두어 떠오르는 문장을 써 보게 하거나, 악보가 전시된 구역엔 미완성된 종이 악보를 두어 음표를 직접 기입할 수 있게 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디자인한 이곳은 시간을 붙잡아 두는 힘이 있었다.

턴테이블과 LP는 제작과 재생 단계마다 사람의 손길이 크게 개입되는 대표적인 아날로그 사물이다. 1949년 ‘33과 3분의 1회전 방식’의 레코드판이 탄생한 이후 LP는 카세트 테이프와 CD가 대세 포맷으로 자리 잡게 될 때까지 음악을 생산하고 구매하는 수단이었다. 1990년대 들어 소니를 비롯한 큰 회사들은 LP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애호가들은 2000년대 CD, MP3 플레이어의 음질을 거부했고, 2015년 애플뮤직 출시를 계기로 물성을 제거한 디지털 음악이 시장을 장악하게 되자 아날로그의 반격이 일어났다. LP 생산량이 늘어난 것이다. 카세트 테이프와 워크맨 시대가 있었고, 표준화 포맷을 두고 다투던 비디오 시장, 디지털 포맷이었지만 빠르게 사라진 레이저 디스크(LD)를 생각하면 LP와 턴테이블의 생명력은 새삼 대단하다.

음악을 만지고, 보고, 읽는 사람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용산에 마련된 '음악의 온도' 전시물. 서울문화재단 제공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용산에 마련된 '음악의 온도' 전시물. 서울문화재단 제공

이는 옛 문화에 향수를 느낀 특정 세대의 일시적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 아날로그는 다소 수고스럽지만 음악 애호가에게 다양한 선택지의 재미를 준다. 턴테이블 없이 LP의 가치를 '굿즈'로 환산해 구매하려는 사람, 중고 LP 매장에서 명반 '디깅'(digging·관심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LP와 턴테이블 조합은 단순한 음악 듣기 이상이다. LP는 재킷 디자인만으로도 수많은 뉴스거리를 쏟아내고, 진공관 오디오를 손수 만드는 사람들에게 음악 재생 과정은 또 다른 세상이다. 이 모든 과정은 음악을 소리로 경험하기까지 손으로 만지고, 보고, 읽고, 소유하고, 느낄 수 있는 행위와 감각을 통해 음악 듣기의 영역을 확장한다.

아날로그 방식 음악 듣기는 듣는 행위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재미를 보강하기도 한다. 일처리를 위해서는 편이나 빠른 속도가 중요하지만, 쉼과 놀이를 위해서는 속도를 늦추거나 역행하는 행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가 늘어난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수고롭게 찾은 앨범을 닦고, 회전 속도를 조율한 턴테이블 위에 얹어 조심스럽게 바늘을 내려놓게 되기까지, 번거로움이 애정으로 바뀌는 순간, 음악 감상 과정은 특별해진다.

지금도 인기 있는 1950년대 턴테이블

브라운의 SK4 턴테이블.

브라운의 SK4 턴테이블.

턴테이블 디자인 역사를 다룬 가디언 슈워츠의 저서 '턴테이블·라이프·디자인'(을유문화사 발행)은 음악 도구, 음향 기술 변화를 통해 성장해 온 아날로그 문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나아가 아날로그 문화가 왜 힘이 있는지를 알려준다. 턴테이블의 디자인 변천사도 흥미롭다. 1950년대에는 1940~1960년대 실용성을 강조한 미드 센추리 디자인을 수용했다. 음질보다 인테리어나 감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 1950년대 독일 브라운사의 SK4 턴테이블은 지금도 인기다. 애플 디자인에 영향을 준 브라운의 전설적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초기 디자인 제품이라는 사실만으로 활발하게 거래가 된다. 그 턴테이블에는 어떤 장르의 음반을 올려놓는지, 소유자의 취향도 궁금해진다.

오디오 평론가 윤광준은 저서 '소리의 황홀'에서 오디오는 음악과 기기, 인간의 세 축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음악성이 빠진 오디오는 공허하고, 오디오적인 섬세함이 빠진 음악도 마찬가지다. 청자가 둘 사이의 균형을 조율할 줄 모른다면 음악 듣기는 돈과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 소유함으로써 채우고 싶은 욕망이 과해지면 오디오의 존재도, 음악의 효용도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의 음악 녹음과 재생 시스템은 사람이 듣고 볼 수 있는 가청 주파수대 최고의 기술과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기술 발전보다 음악 감상자의 취향과 방식의 선택일 것이다. 아날로그 오디오 문화는 ‘레트로’라는, 다소 한시적 유행을 의미하는 단어로 소개돼 왔다. 하지만 100년의 시간을 유지해 온 아날로그 오디오 문화는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며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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