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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입력
2024.07.1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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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수의 마음 읽기]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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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이드아웃 2’에서 주인공의 주요 감정으로 고려되었다가 스토리가 너무 복잡해질까 하여 배제된 감정이 많았다고 한다. 부끄러움·죄책감·부러움 등이었으리라. 부러움에서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불리는 감정도 일어난다.

샤덴프로이데는 Schaden(피해, 손해)와 Freude(기쁨, 즐거움)의 두 단어가 합해진 말로 누군가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는 걸 보았을 때 무심결에 솟아나는 기쁜 감정을 뜻한다.

일본에도 ‘메시우마(メシウマ)’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밥이 맛있다’는 뜻이다. 한국인이라면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놀부 심보에 익숙할 것이고, 맘에 안 드는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실수했을 때 ‘고소하다’는 느낌도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들 중 다수는 뭔가 잘 나가는 동료에게 알 수 없는 시기심을 느낀다. 잘한다던 동료 자녀가 입시에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지만, 시샘을 내는 자신에 대한 혐오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잘 나가는 유명인의 스캔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여긴다.

“시기심과 억울함에서 시작한다.”

질투(Jealousy)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오델로'의 주인공 오델로처럼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타인에게 빼앗길 것 같을 때 그 대상을 배제하려는 부정적 감정이고, 시기심(Envy)은 내가 못 가진 무언가를 가진 사람을 미워하면서 그와 나와의 격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다. 빼앗거나 그가 가진 것을 부숴버리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이아고가 오델로에 대해 가졌던 감정과도 비슷하다.

소아나 사춘기 청소년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폭행과 따돌리기 등의 공격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타고난 성격과 성장 배경 탓일 수도 있지만, 아직 두뇌 전두엽이 미숙하고 가지치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감과 행동 제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성장을 하면서 전전두엽, 특히 내측 전두엽이 자리잡으면서 '사회성'을 갖추게 되고 ‘철이 든’ 성인으로 거듭난다.

성인이 되어서도 시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엔 공정하지 못하다는 억울함을 자주 느끼고, 뭔가 정의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경우 뇌는 그 사람을 비난해도 되는 각종 이유를 만들어내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성이 아니라 신경호르몬에 의한 감정이다.”

샤덴프로이데 감정은 사랑·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옥시토신은 인간 관계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랑과 유대의 호르몬이라 불리지만, 역설적으로 시기심을 강화하기도 한다.

사랑이 지나치게 깊다는 말의 생물학적 해석은 옥시토신의 균형이 깨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애착이 과하면 집착으로 변하고, 누군가를 떠나지 못하게 하거나 집단 의견을 거스르는 사람을 제지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 통일성과 안정성, 친사회성을 강하게 느낄수록 합리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논리와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좀 더 받게 되는 것이다.

조직 안정성을 깨뜨리거나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다소 불편한 감정을 공정과 공공 이익,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뭔가 부정직해 보이는 그들을 맹비난한다. 이런 댓글의 심리도 어쩌면 샤덴프로이데인 것이다. 스스로 윤리적인 사람일수록 샤덴프로이데를 강하게 느낀다고도 한다.

뇌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처벌하면서 도파민의 쾌감을 경험한다. 내가 욕을 먹을지라도 불공정 그 사람을 단죄한다면 다른 집단 구성원이 이익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사도가 된다는 생각에 떳떳하고 뿌듯해진다.

“이성의 뇌로 판단해야 한다.”

분노와 정의를 위해 누군가를 비난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느끼는 정의와 공정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윤리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 중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내가 느끼는 규범이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혀 쫓겨 나거나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복종하는 것을 윤리적 삶이라 느낀다.

그런데, 그 윤리와 규범이라는 것이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하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속한 소집단과 소셜 미디어(SNS)에서 오가는 주류 의견을 마치 내 의견으로 받아들인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공동의 선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거나 무릇 ‘인간이란 이래야 한다’는 등 평소 옳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비윤리적인 폭력적 행동을 쉽게 해낸다고 한다.

협조적이며 순종적인 사람은 폭력적인 비난 댓글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사회에 협조적인 사람은 집단 전체의 공공성과 공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본인 마음속 기준에 따라)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것 같은 사람을 더 용납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집단과 사회라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민족과 지역, 정당이나 동호회를 내가 속한 사회의 모두라고 생각하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죄책감 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당시’의 사회 윤리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지배하는 규칙에 그때그때 순종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집단의 유대와 공익을 강조하는 사람은 집단을 위해 개인을 버리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종류의 사람일 수 있다.

어쨌든 내 기준으로 옳은 편에 서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옥시토신과 도파민을 증가시킨다. 이럴 때 타인에게 ‘좋아요’를 받으며 인정을 받는다면 우리의 뇌는 더 많은 기쁨에 취한다. 나의 정의로움을 확신하면서 ‘정의 중독’에 빠져드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인정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칭찬을 받는 것이기에 더 강한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내 행동 기반인 윤리와 공정은 집단과 개인에 따라 지극히 편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집단 내에서는 소위 집단 극단화 영향으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지금 옳다고 느끼는 ‘사랑’과 ‘공정’은 얼핏 최고의 가치일 수 있지만, 이성을 마비시켜 정의로움으로 위장한 감정에 취해 타인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각자 모두 정의롭지만 항상 이성의 뇌를 켜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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