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어느 자리에서 만난 한 영화인은 새로 사업을 시작했다며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진 가상 배우가 화면 속에서 ‘연기’하고 있었다. 앞의 영화인은 "신종 매니지먼트사업으로 생각한다"며 "성능이 아주 좋은 컴퓨터 몇 대만 있으면 가능한 사업이라 적은 자본으로도 할 수 있다"고 신나 했다. 진화한 딥페이크 기술이 놀라웠고, 새로운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지난주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4~14일)를 취재하다 문화충격을 또 한 차례 경험했다. 인공지능(AI) 영화 시대가 생각보다 더 바짝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AI 영화 관련 부천판타스틱영화제의 다채로운 행사 중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단기 AI 영화학교로 60명이 48시간 동안 AI 영화 제작을 배우며 단편 16편을 만들어냈다. 참가자들은 단 한 번도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배우를 캐스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여 영화를 완성해 냈다. 들어간 비용은 생성형 AI 동영상 프로그램 사용료와 전기료 정도다. “제가 배웠던 영화에 대한 모든 개념이 통째로 흔들려 혼란스럽다.” 신철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위원장이 전한, 한 젊은 영화학도 참가자의 말이다.
AI 영화가 일상이 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술의 안정성이 일단 문제다. 똑같은 명령어를 입력해도 결과물은 매번 다르게 산출된다. 엉뚱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사람을 똑 닮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으나 아직은 사람 같지 않고 거부감을 유발한다. 저작권 문제 해결이 특히 중요하다. 어떤 장면과 인물을 생성했을 때 어떤 자료들을 활용했는지, 초상권과 음성권, 저작권 사용에 대한 대가는 지불했는지 명시돼야 한다.
여러 문제가 있다 해도 AI는 지금 당장에라도 영화계에 쓰일 곳이 적지 않다. 무명 영화인이 돈 들이지 않고 시제품처럼 영상을 만들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제시하기에 좋다. 기존 영화에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AI를 활용한 장편영화 ‘히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배우 톰 행크스가 점점 젊어지는 모습을 컴퓨터그래픽이 아닌 AI를 통해 구현했다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각광 받고 있는 AI 영화 감독 데이브 클락은 “1년 안에 첫 AI 장편영화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화업계에서는 AI 영화에 대해 기대와 더불어 우려를 표시한다. AI가 혁명적인 비용 절감과 편의성을 가져올 수 있으나 일자리를 뺏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신기술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국내 영화 제작과 상영은 2000년대 말부터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됐다. 디지털이 과연 필름 색감을 표현해낼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기도 했다. 국내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일반 상영관은 이제 없다. 영사기사라는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했다. 비용 절감과 편의성이 만든 변화다. AI 영화는 디지털 혁명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연극만 보던 관객들이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보다 더 클 것”(부천판타스틱영화제 관계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우려한다고 AI 영화 시대를 막을 수는 없다.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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