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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을 믿지 말라" 플라스틱 천국 미국의 '일회용 거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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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州) 페어팩스카운티 남부 로톤 파머스 마켓(농산물 직거래 시장). 길 양쪽으로 10개 남짓의 천막이 일요일 오전 손님을 맞았다. 품목은 주로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였는데, 꽃, 맥주, 빵 따위도 보였다. 천막 지붕 뼈대에 어김없이 걸린 것은 연한 청록색 비닐봉지였다. 빈손으로 온 고객은 구매한 식료품을 여기에 담았다.
하지만 천 가방을 들거나 멘 주민도 눈에 띄었다. 시장 어귀에 자리 잡은 연두색 천막은 그들이 들르는 곳이었다. ‘플라스틱 없는 7월’이라 쓰인 입간판에는 ‘일회용 봉지를 거부하라’는 권고가 적혀 있었다. 비영리 기구 ‘플라스틱프리파운데이션’이 세계를 상대로 10여 년간 주도하고 있는 이 캠페인에는 페어팩스카운티도 동참 중이다. 천막 운영은 카운티청 의뢰를 받은 지역 친(親)환경운동 시민단체 ‘클린페어팩스’가 맡았다.
7월은 캠페인 집중 홍보의 달이다. 유인 수단(인센티브)은 경품이다. 별을 9개 모으면 보랭·보온을 위해 안쪽을 코팅한 친환경 재사용 가방을 받을 수 있다. 지참한 자기 재사용 가방을 보여주거나 테이블에 비치된 명부에 서명과 더불어 뉴스레터 수신용 이메일 주소를 적어 넣으면 단체가 카드에 별을 찍어 준다.
마침 70대 부부가 천막을 찾았다. 재사용 가방과 함께 구매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든 채였다. 자신을 갤런드라고 소개한 남편은 “오염과 온난화를 감안하면 쓰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사다 보니 늘 들고 다니는 가방으로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비닐봉지를 썼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클린페어팩스의 프로그램 매니저인 바네사 굴드는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페어팩스카운티 기준 5, 6%에 불과하다”며 “에코백이나 물병 같은 대용품이 있으니 사람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 줘도 상황이 많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식당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집에 가져가는 용도로 쓰는 스티로폼(발포 스타이렌 수지) 상자도 특히 사용 자제가 필요한 일회용 플라스틱으로 그는 꼽았다.
플라스틱은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에 큰 장애물이다. 98% 화석연료로 만들어지다 보니 생산부터 폐기까지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더욱이 플라스틱 폐기물은 분리될 뿐 분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잘게 쪼개진 미세 플라스틱은 오랫동안 썩지 않고 토양, 강, 바다에 스며들어 생태계를 위협한다. 생명체 안에도 고스란히 들어온다. 염증 유발, 면역 세포 억제 등 인체에도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미국은 플라스틱 생산을 많이 할 뿐 아니라 소비 시장도 큰 나라다. 감축 규제에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 내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 규모는 1980년 683만 톤에서 2000년 2,555만 톤으로 급증했고, 2018년 3,568만 톤까지 늘었다. 하지만 1980년 0.3%이던 재활용 비율은 2000년 고작 5.8%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고, 2018년 기준으로도 8.7%에 불과하다.
그나마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시늉이라도 하고 있지만, 원래 미국은 플라스틱 쓰레기 수출국이었다. 2015년 204만 톤이던 수출 규모는 2019년 66만 톤까지 줄었다. 주로 중국에 내다 팔았다가 2018년 중국이 폐기물 수입을 금지하자 쓰레기를 버릴 곳이 없게 됐다.
우회 수출국으로 선택한 베트남도 내년부터 폐기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불가피하게 자국 내 처리 비중을 키워야 했고, 플라스틱 생산량을 확 줄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떠올린 고육책이 재활용 독려였다. 미국의 지난해 플라스틱 폐기물 수출 규모는 42만 톤이었다.
플라스틱 문제는 미국만의 고민이 아니기는 하다. 이미 인류는 ‘플라스틱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해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에 따르면 1950년대 150만 톤 수준이던 플라스틱 생산량은 2021년 3억9,000만 톤까지 늘었다. 70년 새 260배가 된 것이다.
수요가 줄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 등 신흥국 경제 성장과 가벼워지는 자동차, 늘어나는 택배 물량 등이 소비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60년 세계 플라스틱 사용량이 13억2,000만 톤까지 불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플라스틱은 재활용 자체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2022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플라스틱이 재활용되는 비율은 9%에 불과하다. 종류나 성분이 워낙 다양해 함께 재활용하기 까다롭고, 이물질이 많이 묻었거나 너무 작은 쓰레기도 다시 쓸 수 없다. 거의 대부분 매립·소각되는 이유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의 경각심이 약한 것은 ‘재활용하면 된다’는 오해 때문이다. 비영리 단체 ‘비욘드 플라스틱’을 만든 주디스 엥크는 지난해 9월 보스턴 공영 라디오 WBUR 인터뷰에서 “플라스틱 업계는 재활용 불가능 비율이 90%가 넘는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거액을 들여 플라스틱이 재활용 가능하다고 대중이 믿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실제 그렇지 않은데도 재활용됐다거나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위시사이클링(wishcycling)’이 도리어 소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게 ‘웨이스트 랜드’를 쓴 영국 저널리스트 올리버 프랭클린-월리스의 진단이다.
가야 할 길이 감축뿐이라면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소비자 거부 운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적어도 비닐봉지, 포장재 같은 일회용 플라스틱은 고객이 사용을 중단해 업체가 만들지 않도록 압박할 수 있다는 게 일부 환경운동가의 판단이다.
감축 강제론은 자발적 실천에 의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위기 의식이 토대다. 플라스틱 대상 세금 부과에서 시작해 로드맵에 따른 생산량 축소, 전면 사용 금지로 규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게 이런 부류 주장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소규모 유제품 생산업체들이 우유병을 재도입하는 등 다시 채울 수 있는 유리병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페어팩스카운티는 2022년부터 비닐봉지 1장당 5센트를 받는 ‘봉지세’를 도입했고, 캘리포니아주는 10년 전부터 일회용 비닐봉지 제공이 금지돼 있다.
‘플라스틱 없는 7월’ 캠페인을 구상한 플라스틱프리파운데이션 설립자 레베카 프린스-루이즈는 WP에 “정부의 비닐봉지 금지든, 기업의 포장재 교체든 결국 소비자의 요구가 추동력”이라고 말했다.
플라스틱을 포기할 수 없던 미국 기업들은 재활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령 어떻게든 포장재의 운명이 폐기물로 끝나지 않게 만드는 재활용은 가장 효과적인 ‘알리바이’였다. ‘순환 경제’라는 그럴싸한 표현도 있었다. 바이든 행정부도 2021년 11월 제정한 ‘인프라스트럭처(기반시설) 투자와 고용법’에 재활용 인프라 개선 예산을 포함시키는 식으로 매립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투자 대상은 기술이다. 특히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분해해 원료로 되돌린 뒤 재가공하는 첨단 재활용 기술의 진전에 기업들은 기대를 걸었다. 지난 4월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네슬레, 로레알, P&G 등 유수 미국 기업의 투자를 받은 플라스틱 폐기물 재가공 업체 ‘퓨어사이클테크놀러지’를 소개했다. 이 업체는 용제(용해 촉진 물질)를 활용해 냄새와 오염물을 세척하는 식으로 재활용 비율이 2.7%에 불과한 폴리프로필렌 포장재를 새것처럼 탈바꿈시키는 기술을 시험 중이다.
하지만 현재 용제의 효과를 둘러싼 의심과 위험성에 대한 경고에 직면한 상태다. 이에 새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이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기업들이 더 많은 플라스틱 판매를 정당화할 의도로 재활용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낡은 전략을 쓰고 있다는 비판이 환경 단체들로부터 나온다고 NYT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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