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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김혜순·한강의 문학, 이름 없는 두 여성으로부터 시작했다

입력
2024.07.09 17: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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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 원류로
한국 여성문학 100년 계보 다뤄
출간 전에 '완판'... 뜨거운 열기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저자들이 앉아있다. 이선옥(왼쪽부터) 숙명여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 김양선 한림대 교수, 이명호 경희대 교수, 김은하 경희대 교수, 이경수 중앙대 교수. 연합뉴스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저자들이 앉아있다. 이선옥(왼쪽부터) 숙명여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 김양선 한림대 교수, 이명호 경희대 교수, 김은하 경희대 교수, 이경수 중앙대 교수. 연합뉴스


“…여학교를 창설하오니 유지하신 우리 동포 형제 여러 여중 영웅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지심을 내어 귀한 여아들을 우리 여학교에 들여보내리라 하시거든 곧 착명(着名)하시기를 바라나이다.”

-구월 일일 여학교 통문 발기인 이 소사 김 소사

시인 김혜순, 소설가 한강 등 최근 세계 문학계에서 활약이 뚜렷한 한국 여성문학의 시작은 과연 어디일까. 시, 소설, 희곡뿐 아니라 편지, 선언문, 독자 투고 등 공론장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포함한 한국 여성문학사 100년을 짚으려는 시도인 ‘한국 여성문학 선집’(민음사)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 석 자 대신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명칭 ‘소사’를 붙여 각각 이 소사와 김 소사라고 밝힌 여성들이 1898년 9월 황성신문에 투고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이 그 기원이라고.

1898년 익명의 두 소사로부터 나혜석, 노천명, 박경리, 박완서, 그리고 1990년대 한강에 이르기까지.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지금껏 외면받아온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왜 우리에게는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물음에 대한 늦었지만 비로소 도착한 최초의 답이다.

“주변화한 여성문학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쓴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의 김양선(왼쪽부터) 한림대 교수, 이경수 중앙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 이명호 경희대 교수, 이선옥 숙명여대 교수, 김은하 경희대 교수. 민음사 제공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쓴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의 김양선(왼쪽부터) 한림대 교수, 이경수 중앙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 이명호 경희대 교수, 이선옥 숙명여대 교수, 김은하 경희대 교수. 민음사 제공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김양선 한림대 교수는 “지금까지의 문학사나 문학선집에서 여성 작가의 작품은 주변화되어 거의 다뤄지지 않거나 다뤄지더라도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를 포함한 국문학·영문학·시 연구자 6명이 모인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지난 100년 동안의 “여성문학을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김은하 경희대 교수)을 시작했다.

이들은 기성 문학사에서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는 나혜석의 소설 ‘경희’(1918)보다 20년 거슬러 올라간 ‘여학교설시통문’에 주목했다. 여성도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은 문학성이라는 좌표와는 거리가 있지만, 공론장에 ‘글 쓰는 여성’의 존재를 처음으로 등장시켰다. 이처럼 기성 문학 형식을 넘는 사료를 포함해 문학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도 더했다. 이명호 경희대 교수는 “남성 중심의 보편적인 문학사와 다른 젠더적 시각이 들어가는 적극적인 대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을 편집 기준으로 뒀다고 전했다.

총 7권의 ‘한국 여성문학 선집’에는 낯선 이름들도 눈에 띈다. 1980년대 버스 안내원으로 일한 경험을 시로 쓴 최명자 시인이나 ‘동일방직 노조 똥물 투척 사건’을 다룬 정명자 시인, 월남 작가 박순녀와 이정호 등이다. 선집에 실린 작품들 역시 유명세보다 “여성 주체가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당대 현실에서 주체로서 발화하고 저항하는지 측면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뽑았다.

“문학 모르는 이류 연구자” 비판에도 12년 작업

한국 여성문학 선집. 민음사 제공

한국 여성문학 선집. 민음사 제공

이번 작업은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김은하 교수는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국문학과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여성문학을 배우지 못했다”며 “학위논문으로 여성문학을 연구한다고 하면 교수님들은 ‘이류 연구자가 되려 하나’ ‘중요한 작가가 아니다’ ‘문학을 모른다’고 말렸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로 재야의 학술연구소로 향해야 했던 여성 연구자들로부터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태동했다. 이들은 의견 차이로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인 끝에 오랫동안 아예 모임을 중단하기도 하면서 12년간 작업을 이어왔다.

책으로 나오기까지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김은하 교수가 민음사에 출간기획서를 보냈지만, 출판사의 고민이 깊었다. 박혜진 민음사 한국문학팀장은 “문학 선집이라는 것이 여러 작품을 싣는 만큼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데 비해 상업적으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여성문학 서사의 큰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이끈 독자들에게 우리의 고전이 필요하기에 (책으로) 내겠다고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최초의 대답에 대한 호응은 뜨겁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지난달 책 출간에 앞서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북펀드 형태로 사전주문을 받았다. 펀딩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목표액을 달성했고, 2주 동안 총 2,800만 원이라는 큰 금액이 모였다. 박혜진 팀장은 “책 초판이 나오기도 전에 다 판매된 셈”이라며 “예상보다 2~3배 이상의 반응”이라고 귀띔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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